박종훈(28)이 '국제용' 잠수함 투수 계보를 잇는다. 유일하게 부족했던 경험도 채우고 있다.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 대한민국 대표팀은 쿠바에 3-2로 앞선 9회말 수비에서 1사 만루를 내주며 역전 위기에 놓였다. 이 상황에서 우완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41·은퇴)이 마운드에 올랐다. 당시엔 쿠바 주축 타자, 현재는 메이저리거인 율리에스키 구리엘(휴스턴)을 상대했다. 유격수 땅볼을 유도했고 더블플레이로 이어졌다. 대표팀의 리드를 지켜냈다.
이 순간을 돌아본 정대현은 2구째 던진 공이 가운데로 몰렸는데도 구리엘이 배트를 내지 못하자 자신감이 생겼다고 전했다. 3구째이자 메달 색깔을 가른 결정구는 바깥쪽(우타자 기준) 슬라이더였다. 히팅포인트를 완전히 벗어난 스윙을 유도했다.
옆구리 투수가 왜 중남미 국가 타선을 상대로 강세를 보이는지 알 수 있는 승부였다. 낯선 유형이 던지는 생소한 궤적은 타이밍으로 갈리는 타자와 투수의 승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정대현은 전성기가 지난 시점이던 2015 프리미어12 대표팀에도 승선했다. 임창용, 우규민, 심창민 등 다른 옆구리 투수도 전후 국제대회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SK 3선발 박종훈은 대표팀 '잠수함 투수' 계보의 현재이자 미래다. 그는 KBO 리그에서 가장 릴리스포인트가 낮은 투수다. 커브를 구사하면 리그 베테랑 타자조차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워한다. 통산 141경기에 선발로 나서며 연차에 비해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정대현 등 선배들이 쥐었던 바통을 이어받고 대표팀에 승선했다.
지난 8일에 열린 2019 프리미어12 C조 예선 3차전, 쿠바와의 경기에서도 기대에 부응했다. 선발 등판해 4이닝 동안 4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다. 3·4회, 2사 이후 흔들리긴 했지만, 실점 위기에서는 집중력을 발휘하며 범타로 이닝을 마쳤다. 7-0 완승에 기여했다.
경기 뒤 미구엘보로토 쿠바 감독은 "선발투수의 공이 올라오는 각도가 생소했다. 라틴 아메리카, 특히 쿠바에는 없는 유형의 투수다"며 무득점에 그친 원인을 전했다. 중계 화면을 통해 박종훈의 투구 폼을 따라 하는 쿠바 코치의 모습이 잡히기도 했다. 그만큼 낯선 투구폼이었다. 1, 2회에 나선 타자들은 전혀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큰 스윙을 연발했다.
지난해 열린 아시안게임에서의 아쉬움을 털어냈다. 당시 박종훈은 상대적으로 약체인 인도네시아전에 등판해 3이닝을 소화했다. 그러나 메달 획득에 분수령이 되는 경기는 나서지 않았다. 반면 쿠바전은 C조 순위가 결정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경기에 나섰다.
대표팀은 15일에 멕시코와 슈퍼라운드 세 번째 경기를 치른다. 박종훈이 선발로 등판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쿠바전을 치른 뒤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 나선 경험이 없어서 긴장했다. 그러나 재미있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이제 긴장감은 다스렸다. 박종훈의 국제무대 연착륙은 대표팀의 2020 도쿄 올림픽 선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요인이다. 프리미어12는 그가 국제용 잠수함 투수로 진화하는 첫 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