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이상의 결과물은 배우에게도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배우가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는 단연 연기력.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출중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는 결코 밉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한 번은 볼 것이라 예상했던 박희순(42)의 '망가짐'이다. 데뷔 26년 만이다. "기다렸던 시나리오다"며 스스로도 흡족해 할 만큼 영화 '올레'(채두병 감독)는 박희순에게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파격 펌 헤어에 음담패설, 음주에 가무까지 안 하는 것이 없다. 박예진과의 결혼 이후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지만 변화의 이유가 결혼은 아니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 여전이 연기에 대한 고민이 한 가득이라는 박희순이 오랜만에 마음껏 까불었다.
※인터뷰 ①에서 이어집니다.
-마냥 가볍기만 한 캐릭터는 아니지 않나.
"13년간 고시 공부에 매달렸던 친구다. 내면의 감정선은 이미 다운 돼 있는 친구다. 조울증 증세가 있다. 그런 수탁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스스로 탈피해 보려 했지만 본인이 갖고 있는 심성 자체가 우울하고 비관적이라 쉽지 않다. 여자를 밝히는 캐릭터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이유다."
-겉과 속이 달랐다는 뜻인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 보이기 위해 겉으로 더 오버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냐. 난 수탁을 그런 인물로 생각했다. 갇혀있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여자에게 마음 표현도 못하고 서투른 친구이기 때문에 기껏 하는 고백도 유치하고 민망하다. 과거에도 친구 때문에 좋아하는 여자를 포기하지 않나. 아마 신하균(중필)에게 하는 말도 어쩌면 가장 용기없던 본인에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탁의 고백 장면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재미있으면서도 진정성 있게 하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지금까지 수탁이 벌였던 말장난과 사고친 것을 잠시 잊고 진짜 수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신이었기 때문에 어려웠다. 배우가 이렇게 연기를 했다고 해서 100% 그 감정을 관객이 똑같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정답일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다"는 말도 진심인지 아닌지 애매모호 하더라.
"나도 감독님에게 그 얘기를 했다. '마지막에 멋지게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려면 수탁의 진심어린 감정이 보일만한 에피소드가 있어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 근데 감독님은 수탁이 이 여자에게 어떤 충동을 느낀다기 보다, 여자가 마음에 들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늪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우선적인 인물로 설정했다고 하셨다."
-나를 위해 여자와 상황을 이용했다는 뜻인가?
"이용이라기 보다는 나를 깨부수고 나올 수 있는 계기라고 보신 것 아닐까? 손 잡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이 여자가 좋은데 여자에게 제대로 고백을 해 본 적은 없는 남자다. '언젠가는 하고 싶다'는 마음만 품고 있는 것이다. 수탁으로서는 그 욕망을 깨부수는 것이, 갇혀있던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사랑을 한다는 그 자체보다 우선적이라는 뜻 아닐까. 내 진심을 보여야 사랑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단순한 사랑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설명이었다."
-여성 관객들 입장에서는 '불쾌하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 많았다.
"사실 시사회가 끝나고 우리끼리 술 마시면서 몇 마디 나눈 이야기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담을 수 있는 것인데 사회가 워낙 흉흉하다 보니 자체 검열을 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여자 앞에서 성희롱을 한 것도 아니고, 친구들 몇 명이 킥킥대면서 자기들끼리 노는 것 아니냐. 용기도 없어 뭔가 저지르지도 못하는 사람들인데 과연 그 친구들의 행동이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줄까? 싶었다. 사회 자체가 너무 각박해 지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도 생겼다."
-검열은 어떤 부분에 대한 검열이었나.
"혹시라도 여성 분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신들에 대한 검열이었다. 그래서 내 신이 많이 날아갔다. 영화 초반에 보면 게스트 하우스에서 정석용 씨가 등장하지 않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었다. 알고보니 여자를 꼬시는데 완전 고수인 분인 것이다. 그 분이 한 여성과 키스를 하고 있고 내가 그걸 바라보다가 나중에 뒤쫓아가서 '어떻게 하면 여자를 만날 수 있냐'고 묻는다. 그럼 '제주도는 그런 곳이 아니야. 여자 꼬시러 오는 곳이 아니라 어머니의 젖과 같은 곳이라고'라는 말씀을 하신다. 필요한 포인트였는데 여성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 있겠다 싶어 뺐다. 순수하고 모자라고 서툰 친구들의 이야기일 뿐인데 그렇게 보신다면 섭섭하다."
-영화 속 상황처럼 실제로도 어린 여자 후배들과 촬영을 해야 했다. 어땠나.
"연기할 때 오히려 더 민망했던 것 같다.(웃음) 그 친구들과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진짜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나 친구가 될 수 있듯 간만에 MT를 떠난 느낌이었다. 막걸리 파티를 하며 돈독하게 지냈다. 그래서 촬영할 때 쑥스러움이나 창피함이 조금 덜 했던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