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온 지 어느새 2주 가까이 되어간다. 한국 축구대표팀을 취재하기 위해 1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생전 처음 러시아 땅을 밟았다. 여행 책자에서나 보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짐을 풀고, 대표팀을 쫓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제한된 시간 동안 보여주는 아주 짧은 시간의 훈련 모습을 눈에 담으러 왕복 2시간씩 버스로 이동하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래도 피곤함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스웨덴전을 앞두고 선수들이 놀라울 정도로 자신감에 차있었고, 뭔가 '사고' 한 번 치는 게 아닐까 싶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레오강 전지훈련 때부터 취재해 온 선배들도 "단기간에 분위기가 너무 많이 바뀌었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러시아 입성 후 180도 바뀐 선수단 분위기는 그래서 혹시 모를 '이변'의 밑그림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 취재하는 월드컵 무대에서 그라운드 위 태극기가 펼쳐지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훈련을 쫓아다니며 지켜봤던 선수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태극기 위에 오버랩됐다. '사고 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반 15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승리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0-1 패배. 유효슈팅이 0개였을 정도로 소극적이고 밋밋했던 경기였다. 분노보단 허탈함이 컸고 그래서 차마 '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선수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은 핏기와 함께 사라져있었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죄인처럼 인터뷰하는 모습에 새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가 서있는 위치라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졌다.
3전 전패로 끝나리란 불길한 예언들 속에서 애써 가꾼 자신감은 첫 경기 패배로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렸다. 남은 상대는 첩첩산중, 스웨덴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해보이지 않는 두 팀이고 이 이상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누가 봐도 결과가 뻔한 게임. 지는 쪽이 정해져 있는 그런 재미없는 게임 같았다. 그래서 못했다고, 실수했다고, 열심히 뛰지 않았다고 욕을 먹는 선수들을 지켜보며 이기지 못할 거라면 부디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도 할 수 있길 간절히 빌어보기도 했다.
효험이 있었는지 24일 열린 멕시코와 2차전은 손흥민(26·토트넘)의 그림같은 후반 추가시간 만회포로 '졌잘싸' 비슷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대신 페널티킥을 내주고 두 번째 실점 장면에도 아쉬운 수비를 보여준 장현수(27·FC 도쿄)가 비난의 십자포화를 맞게 됐지만. 그래도 2패한 상황에서 영락없이 탈락 확정일까봐 걱정했는데 독일이 한국을 기사회생시켜준 덕분에 선수들은 마지막 3차전에서 실낱같은 16강 희망에 모든 걸 걸어볼 기회를 얻게 됐다.
이젠 정말 투혼을 발휘해야 할 때, 라고 써야하지만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4년 만에 한 번 찾아오는 전세계인의 축구 축제, 축제라고 쓰고 전쟁이라고 읽는 이 월드컵 무대에서 한국이 얼마나 약팀인지 새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투혼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터져나오는 한국 축구 고유의 DNA인 투혼은 지금까지 우리가 월드컵에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부상 투혼, 노장 투혼…. 첫 도전부터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던 2002 한일 월드컵,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한국 축구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역사에는 모든 부분에 투혼의 눈물자국이 묻어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비약적이지만 투혼 없이는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약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기력에서 부족한 부분을 투혼으로 메우고,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하게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한다.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경우의 수'는 자력으로 결과를 내기 힘든 약팀들이 주로 빠지는 늪이다. 독일의 극적 역전골로 실낱같은 16강 가능성이 생겨난 그 순간, 습관처럼 '경우의 수'부터 찾던 기자들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경우의 수 찾는 건 한국 기자들이 최고"라고 읊조린 건 역시 우리가 약팀이기 때문이다. 멕시코전을 앞두고 취재진과 만난 이영표(41) KBS 해설위원이 "위기의 순간 나오는 한국 대표팀만의 멘털리티, 그 엄청난 에너지에 기대를 건다"면서도 "우린 언제까지 그 에너지에 기대를 걸어야 하나, 투혼에 기대야 하나. 그냥 베이직하게 축구를 잘 하면 안되나"고 되묻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안타깝게도 우린 강팀이 아니다. 월드컵 4강의 기적 뒤 고군분투하며 원정 16강까지 이뤄내면서 제법 강해진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투혼에 기대고, 경우의 수에 매달려야 하는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 무대에서 분명 약팀이다. 물론 투혼도, 경우의 수도 약팀의 생존방식이란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린 대체 언제까지 약팀의 방식으로 살아남아야 할까. 우리가 강팀의 반열에 올라서는 순간은 언제쯤 올까. 한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선수이자 잉글랜드 무대에서도 '알아주는' 선수인 손흥민의 입에서 "어차피 우린 최약체"라는 말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순간은 언제가 될까. 4년 마다 한 번씩 자문하게 되는 이 질문의 답은 대체 누가 줄 수 있을까. 쓰라린 궁금증은 쌓여만 가는데 해결해줄 이는 보이지 않아 더욱 답답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