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야구단에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는 불펜 포수가 있다. 주인공은 나카니시 카즈미(31). 올해로 4년째 SK 야구단에서 일하고 있는 카즈미는 사연 많은 남자다.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대학교까지 야구선수로 뛰었고, 고등학교 때는 일본 최고 고교 대회인 '고시엔'(전국 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 무대에서 뛰기도 했다. 친·인척 중에 교포가 없는 순수 일본인이지만 한국어를 능숙하게 잘한다. 일본 프로야구 진출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SK에서 '제2의 야구 인생'을 만들어 가고 있다.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카즈미는 2014년 2월 통역 공고를 보고 지원해 합격했다. 당시 그의 역할은 세이케 마사카즈 1군 수비코치의 통역 업무. 이후 하세베 유타카 배터리코치의 통역까지 맡았다. 하지만 2016시즌부터 일본인 코치가 모두 팀을 떠났다. 팀 내 위치가 애매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불펜 포수부터 훈련 보조까지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생존'했다.
주변의 평가가 대단하다. 트레이 힐만 SK 감독은 "카즈미는 훌륭한 멘틀을 갖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탬이 될 방법을 찾는다"며 "불펜에서는 투수들을 매우 편하게 해 주고 배팅볼도 최대한 타자들이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던져 주고 있다. 우리팀의 소중한 자산이다"고 말했다. 이제는 SK의 중요한 일원이 된 그에게 직접 야구 인생을 물었다.
- 처음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일본에선 원래 모교(추쿄대 부속 추쿄고교)의 야구팀 코치를 하기로 결정돼 있었다. 하지만 한국이 좋았다. 초등학교 때 야구를 하면서 대표로 뽑혀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대학교 때 우연치 않게 제2 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우다가 더 큰 관심이 생겼다. 이전에 빙그레에서 뛰었던 고원부씨가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과 친구였는데, 그분을 통해 2009년 3월 한국으로 오게 됐다. 공교롭게도 내가 코치를 맡게 돼 있었던 모교인 추쿄고는 2009년 열린 고시엔에서 우승했다."
- 안정된 생활을 접고 낯선 나라로 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정해져 있는 삶은 뭔가 심심한 느낌이랄까. 고등학교 코치를 했다면 고등학교 코치로 내 인생이 끝났을 거다. 일본은 한국, 중국과 비교했을 때 해외로 유학을 가는 사람이 적다. 문제는 한국말을 잘 몰랐다. 처음 한국에 와서 경희대 어학당을 6개월 정도 다녔다. 이후 일본에 다시 가 워킹홀리데이를 받고 돌아왔다. 한국 생활이 재밌더라."
-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았나. "외동아들이라 만류가 심하셨다. '한국에 가고 싶으면 혼자 준비를 해서 가라'고 하시더라. 대학교는 가을이면 야구 시즌이 끝난다. 졸업까지 5개월 정도 시간이 남아 한국에 갈 생각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 어떤 아르바이트를 했나. "낮에는 고원부씨가 운영하는 종합상사에서 유통 관련 일을 했고, 밤에는 사우나에서 접수를 받았다. 주말에는 결혼식장에서 서빙을 했다. 일본은 코스 요리가 나오기 때문에 일이 많다.(웃음) 시급이 높았다. 한 달에 한 번 쉬었다. 부모님께서 나중에 '얘가 이 정도로 가고 싶어 하는구나 싶었다'고 말씀하시더라. 6개월만 유학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한국이 좋아서 아직까지 머물고 있다."
- 야구선수 출신으로 알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추쿄대 4학년까지 야구를 했다. 하지만 프로에 가지 못했다. 실력도 부족했고, 신체 조건(키 167cm)도 좋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밥솥에 밥을 했다고 가정했을 때, 주걱도 아니고 숟가락으로 한 스푼만 프로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워낙 선수가 많고 운도 필요한데 난 여러 가지로 부족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피겨스케이팅선수인 아사다 마오, 안도 미키가 학교 후배다.(웃음)"
- 고시엔 대회도 나가지 않았나. "고등학교 3학년 때 8강까지 올랐다. 그때 주전 3루수 겸 팀의 부주장이었다. 같은 지역(나고야)에 모리후쿠 마사히코(당시 토요카와고교·현 요미우리)가 뛰었고, 지역 예선 결승에서 맞붙었다. 운이 좋게도 결승전에서 2안타를 때렸고, 이겨서 본선에 올랐다. 그해는 고시엔 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홋카이도 지역 학교(도마코마이고교)가 우승을 했다. 당시 그 학교 1학년생이 다나카 마사히로(현 뉴욕 양키스)다. 당시에는 두각을 크게 나타내지 못했을 때였다. 다르빗슈 유(현 텍사스)도 3학년 때 함께 대회를 나갔는데, 다르빗슈가 소속된 학교(도호쿠고교)는 16강에서 떨어졌다."
- 일본에선 실업야구도 저변이 좋지 않나. "실업야구는 갈 수 있었을 텐데, 갔어도 길게 하진 못했을 것 같다. 그때는 젊으니까 하고 싶은 걸 해 보자는 생각이 강했다. 무작정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좋은 선택이었다."
- SK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같이 사회인 야구를 하던 형이 SK에서 채용 공고가 나왔다고 알려 주더라.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면접까지 다 통과한 후 들어오게 됐다."
- 선수로 뛰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일본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야구 경기를 많이 보진 않았다. 처음 SK에 와서 모처럼 직접 현장에서 야구를 보니까 그때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행복하다."
- 등번호가 현재 105번인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3루수를 맡았을 때 등번호가 5번이었다. 5번이라는 숫자에 대한 애정이 있다. 100번 이후 등번호는 아무거나 달아도 된다고 하길래 105번을 선택했다. 원정 유니폼에는 이름까지 적혀 있는데, 이름이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가끔 계신다. 감사한 마음이다."
- 한국행을 반대했던 부모님도 달라지셨을 것 같다. "SK에 오기 전에는 잔소리도 많이 하셨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하신다. 2012년에는 한국에서 결혼까지 했고, 딸도 있다.(웃음) 일본 집에 한국 채널을 볼 수 있게 해 놨는데 가끔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시는 것 같다. 1년에 한 번 정도 집에 간다. 일본 오키나와로 스프링캠프를 가도 거리가 멀어서 집에 가지 못한다. 그게 미안하다."
- 한국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아마 KBO 리그 구단에 (코치를 제외한) 일본인은 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 프로야구단에서 통역을 비롯해 일본과 관련된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