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결승전엔 제가 선발로 나가겠습니다.” 정윤진(43) 덕수고 감독은 투수 엄상백(18)에게 세 번이나 되물었다. “괜찮겠냐?” 엄상백은 세 번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28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충암고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덕수고 정윤진 감독과 엄상백은 한참동안 실랑이를 했다. 이유는 있었다. 엄상백은 전날(27일) 유신고와의 4강전에서 이미 124개의 공을 던졌다. 또 이 대회 1회전부터 4경기에 모두 등판해 적지않은 투구수를 기록했다. 특히 16강전부터는 3일 연투를 했던 터라 정윤진 감독은 엄상백의 팔 상태가 걱정됐던 것이다.
정윤진 감독은 경기 초반 최대한 그를 아끼고 승부처에 엄상백을 투입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평소 엄상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집을 쉽게 꺾을 수 없었다. 정윤진 감독은 “딱 보면 알겠지만 가냘프다. 체력적으로 힘든 게 보이지만, 그래도 본인이 하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해 말릴 수 없었다”고 했다. 엄상백은 감독의 우려와는 달리 마운드 위에서 최고의 피칭을 보여줬다. 그는 결승전에서 9이닝 동안 107개의 공을 던지며 6피안타 10탈삼진, 무사사구 완봉승을 거뒀다. 그는 대회 MVP에 선정되며 우승의 주역이 됐다.
이번 대회 우승은 덕수고에게는 의미가 남다르다. 덕수고는 지난 2012년과 2013년에 이어 청룡기 대회에서만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선수들이 느끼는 의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엄상백은 "(3연패가 걸려있는) 결승전에서 가장 절실하게 던졌다"고 했다.
이번 대회 엄상백의 투구를 본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은 “올해 신인 중 내년에 가장 먼저 1군에서 볼 수 있는 선수”라는 평가를 내렸다. 엄상백은 지난달 30일 신인 1차 지명에서 kt의 선택을 받았다. 엄상백의 호투를 현장에서 지켜본 조찬관 kt 스카우트 팀장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엄상백은 올 시즌 전까지만 해도 직구 최고 구속이 시속 140km 언저리에 머물렀다. 188cm의 큰 키가 무색할정도로 마른 체구(73kg) 탓이었다. 하지만 3학년이 되고 경기 경험을 쌓고, 힘이 붙으면서 구속이 증가했다. 엄상백은 이번 대회 신일고와의 8강전에선 최고 시속 148km까지 찍었다.
조 팀장은 "고교 선수지만 엄상백은 마운드 위에서 자기 볼을 던질 줄 안다"고 평했다. 엄상백은 결승전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고교 투수들의 실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엄상백의 호투는 인상깊었다. 구석을 찌르는 날카로운 제구력이 돋보였고, 사이드암스로 투수답게 지저분한 볼 끝도 좋았다. 이번 대회에서 상대 타자를 압도한다는 느낌을 준 유일한 선수였다.
엄상백을 바라보는 조범현 kt 감독의 기대도 남다르다. 조범현 감독은 엄상백을 지명한 후 시간을 내 덕수고에 직접 방문해 엄상백의 투구를 면밀히 관찰했다. 이날 동행한 조찬관 팀장은 “밸런스, 제구력, 구질 모두 맘에 들어 했다”며 "상당히 만족했다"고 전했다. 조 팀장은 "마무리 훈련을 통해서 선발과 중간 보직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시험해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엄상백은 임창용을 닮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2년 안에 kt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를 잡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한다. kt가 확실한 떡잎을 고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