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72) 감독은 쌍방울-두산(전신 OB 포함)-한화를 거치며 감독 통산 978승(역대 3위)을 올렸다. 또한 WBC와 프리미어 12·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제 대회에서 대표팀의 호성적을이끌어 '국민감독'으로 통한다. 현장에서 물러난 현재는 KBO 총재고문을 맡아우리나라 야구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선수로, 코치로, 감독으로, 고문으로 한국 야구의현장 속에 늘 몸담았던 김인식 감독은 이번 사담기 출연을 통해 촌철살인 ‘야생야사’ 토크를 펼쳤다는 후문이다.
누구에게나 시작이 있듯 '감독' 김인식에게도 '선수 시절'이 있었다. 네 살 때 6·25전쟁을 경험했던 김인식 감독은 전쟁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살면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인식 감독이 살았던 돈암동에는 당시 야구로 유명했던 경동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영향으로 동네 꼬마들과 자연스럽게 야구를 시작하게 됐다. 이후 김인식 감독은 배문중을 거쳐 배문고로 진학하며 야구선수로 성장했다. 야구를 시작한 지 1년 만인 1961년 대한체육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최우수선수(연식 야구)'에 선정돼 될성부른 떡잎임을 보여 줬다. 1965년 크라운맥주에 입단해실업 선수로 발을 내디뎠고, 입단 첫해 9승2패 평균자책점 1.49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하지만당시 의료 기술로는 치료할 수 없었던 어깨 부상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통증의 원인도, 치료 방법도 알 수 없었기에 아쉬움을 삼키며 은퇴를 받아들인 김인식 감독은 이후 모교 배문고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 새 출발을 했다. 김인식 감독은쌍방울(2시즌) 두산(9시즌) 한화(5시즌)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특히 1995년과 2001년 두산(전신 OB 포함)에서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일명 '항명 파동'으로 팀 안팎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상황에서 OB 사령탑에 오른김인식 감독은 특유의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 우승을 일궈 낼 수 있었다고한다. 김인식 감독이 꼽는 우승의 원동력은 당시 내야수였던 심정수다. 김인식 감독의 부임 전인 1994년심정수는 그해 3홈런에 그쳤으나외야수로 포지션을 바꾼 뒤 홈런타자로 성장했다. 김인식 감독의 선수 보는 안목이 빛을 발휘한 부분이다. 김 감독은 2004년 한화로 팀을 옮겼고, 이후한화를 3년(2005~2007년) 연속 가을 야구로 이끌며 명장 반열에 확실히 올라섰다. 한화는 이후 11년 만인 지난해에서야 가을 야구를 경험했다. 2009년 한화를 떠나게 된 김인식 감독은 홈에서 시즌 최종전이 끝난 직후 한화 선수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선수단 전원이 떠나는 감독을 위해 그라운드 위에서 큰절을 올린 것. 사전에 이런 상황을 전혀 몰랐던 김인식 감독은 큰절을 보자마자 펑펑 울었다고 한다. 곰과 독수리의 영원한 스승으로 남은 김인식 감독, 통산 978승의 여정은 김인식 감독 자신과 싸움이기도 했다.
그가 '국민감독'으로 불리게 된 것은 WBC와 올림픽, 아시안게임을 비롯한 국제 대회에서 보여 준 성과 덕분이다. 제1회 WBC 당시 해외파들의 대거 합류로 최고의 라인업을 구축했던 대표팀은 미국과 일본을 잇달아 격파하는 성과를 올렸다. 2009년 WBC에선 결승전 신화를, 2015 프리미어 12에선 초대 우승을 이끌었다.
이처럼 각종 국제 대회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만났던 김인식 감독. 수많은 제자를 둔 김인식 감독은 사담기 출연에 앞서 자신만의 '드림팀' 명단을 작성하는 열의를 보여 줬다.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부터 내야수·외야수까지.김인식 감독의 선택을 받은 선수는 과연 누구일까.
김인식 감독과 함께한 사담기는 20일 목요일 오후 11시 JTBC3 FOX Sports에서 방송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