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4할 타율은 신화의 영웅담처럼 이야기된다. 그러나 타율은 다양한 공격 방법 중 안타만을 다루는 지표다. 이젠 KBO리그에서도 타자의 실력을 논할 때 출루율, 장타율, OPS 등이 우선된다.
하지만 이런 지표도 본질적인 결점을 안고 있다. 표본이 충분히 쌓여야 노이즈가 제거되고, 일정한 수준에서 값이 움직인다다. 또 이 지표들은 '결과의 해석'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통계적으로 타율은 910타수라는 표본이 쌓였을 때부터 일정한 수준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데뷔전에서 4안타를 친 신인에게 타율 4할을 기대하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타자의 실력을 평가하기 위해선 한 시즌 혹은 그 이상의 누적된 기록이 필요하다.
그러나 적당한 표본이 쌓이더라도 ‘타자 실력의 원천이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에는 본질적인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좋은 안타라는 '결과'에 대한 '원인'은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갈증에서 현대 야구 데이터 분석은 시작됐다.
그리고 좋은 조건을 만났다.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원초적 데이터는 스탯캐스트(Statcast) 시스템이 측정한다. 최근 중시되는 지표가 바로 ‘타구 속도(Exit velocity)’다.
타구 속도는 이름처럼 야구공이 배트에서 나가는(Exit) 순간의 속도를 말한다. 강하고 정확하게 맞은 타구일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건 자명하다. 빠른 타구일수록 수비수의 포위망을 빠져나가 안타가 될 확률은 높아진다.
타구 속도는 기존 통계 지표들의 단점 2가지를 극복할 수 있다. 첫째, 타구 속도는 적은 표본으로도 타율보다 훨씬 높은 신뢰도를 갖는다. 한 달 정도 시간만 지나면 타자가 얼마나 잘 맞은 타구를 많이 만들어내는지를 알 수 있다.
둘째, 타구 속도는 결과를 만드는 '과정'에 힌트를 제공한다. 굼벵이처럼 느린 타구는 홈런이 될 수 없다. 홈런 대부분은 시속 100마일(161km)에 가까운 타구 속도를 가진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직관은 타구 속도가 빠를수록 안타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수비수의 정면으로 향하지 않는 이상, 총알 같은 타구가 쉽게 안타가 된다는 건 상식이다. 이 상식을 타자의 중간 목표로 세울 수 있다. 선수에게는 '홈런을 치라'보다는, '빠른 타구를 만들어내라'가 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일 것이다.
타구 속도는 선수의 잠재 능력을 측정하는 데도 유용하다. 올해 박병호의 메이저리그 진출에는 타구 속도 데이터가 상당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잠실 구장과 목동 구장에서 측정된 박병호의 뜬 공과 라인드라이브 타구 속도는 평균 시속 160km에 달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정상급인 수치로, 박병호는 지금 미국에서 한국 시절과 다를 바 없는 빠른 타구를 생산하고 있다.
물론 타구 속도만으로 타자의 능력을 줄 세울 수는 없다. 투구 구속이 투수의 능력을 모두 알려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타구의 질'이라는 음식의 요리법에는, 속도 뿐 아니라 각도와 방향도 포함된다.
아무리 빠른 타구라도 하늘 높이 뜨기만 하면 평범한 내야 플라이로 그치게 된다. 강한 타구를 낮은 탄도로 발사하더라도, 시종일관 당겨치기만 한다면 상대 시프트에 걸리기 십상이다. 박병호만큼 강하게 공을 쳐도 땅볼이 된다면 내야수의 글러브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결국, 타구 속도라는 한 가지 잣대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타구와 지표면이 이루는 각도, 타구의 좌우 방향, 그리고 공을 때린 타자의 달리기 속도에 이르기까지, 배트에 맞은 공을 안타로 만들어내는 변수는 여러가지다.
현 시점에서 타구 속도를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하나는 박병호의 사례와 같이, 선수의 잠재 능력을 평가하는 가늠자로 쓰는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타자 뿐 아니라 투수의 ‘피 타구 속도’에도 주목하고 있다.
또 하나는 선수에게 '눈에 잡히는' 목표로 타구 속도의 향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난해 KBO리그 넥센의 김하성은 5월 한 달간 타율 0.221의 부진에 빠졌다. '슬럼프인가?'라는 의문에 빠졌을 때 이지풍 트레이닝 코치는 "타구 질은 괜찮은데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조언을 했다.
그 뒤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김하성의 올 시즌 목표는 ‘질 좋은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박기태(비즈볼프로젝트)
Bizball Project
지속적인 스포츠 콘텐트 생산을 목표로 하는 젊은 스포츠 연구자들의 모임. 일간스포츠와는 2014년부터 협력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