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톱 모델이었던 그는 '옷 좀 입는다'하는 남자들의 우상이었다. 그랬던 배정남이 예능프로그램에 발을 디디더니 180도 다른 사람이 돼 나타났다.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의리있고 잘생긴 옆집 형으로 변신했다. 예능 베테랑만 모인 MBC '무한도전'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MBC '라디오스타' 출연 한 번으로 "슈어. 와이 낫?(Sure. Why not?)"이란 유행어도 만들었다. 해맑은 미소와 거침없는 입담은 패션만큼이나 배정남을 설명하는 필수 요소가 됐다.
배우로서 필모그래피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다. 알고 보면 대작들에 얼굴을 비쳤다. '베를린(류승완 감독·2013)'과 '마스터(조의석 감독·2016)'에 출연했고, 2015년 방송된 SBS 드라마 '심야식당'에도 깜짝 등장했다. 그리고 지난 5월 개봉해 258만 명의 관객을 모아 기대 이상의 흥행을 일궈낸 '보안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어컨 설비 기사 춘모 역을 맡아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를 소화했다.
직접 만난 배정남은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소탈하고 단단했다. 사람을 좋아하며 모두와 잘 어울리는 친구였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게서 배울 점을 찾아내는 긍정맨이기도 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인생을 배웠고, 주연 자리를 놓친 절체절명의 그 때 자만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이야기했다.
-흙수저라는 수식어가 있어요.
"맞아요. 다락방에 살았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할머니 손에서 크다가 작은 아버지 따라 갔어요. 중학교 때는 혼자 살았어요. 하숙할 때는 밑에 살던 할머니가 밥을 챙겨줬어요."
-그럼에도 구김살이 없네요.
"어렸을 때는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자다가 울기도 했고요. 중학교 땐 매일 친구 집에서 잤어요. 친구 엄마가 밥을 챙겨주거든요. 눈칫밥을 먹었어요. 일주일에 하루만 간 게 아니라 일주일에 삼일씩 갔으니까요. 그때부터 나를 숨기고 눈치를 볼 줄 알았죠. 고등학교 때 슈퍼마켓을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집에 매일 갔죠. 눈치는 보이는데 그게 좋았어요. 엄마가 아침밥을 차려주니까요. 스무살 때부터도 절 먹여살린 형이 있었어요."
-10대에 방황을 했다면서요.
"중학교 때 방황했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니 방황을 안 할 수가 있나요. 집에도 누가 있어야 가출이 되죠. 그래도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키워서 할머니를 봐서라도 잘 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돈이 없어서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어요. 고등학교 때 공장에 취업했죠. 안 자고 일했어요. 거기서 베테랑들 다 제치고 1등을 했어요. 그런데 쇳덩어리를 다루다가 허리가 나간 거예요. 어릴 땐 멋모르고 하니까요. 더 이상 일을 못 할 정도로 아파서 그만뒀어요. 시급이 2050원이었어요. 하루종일 일해도 2만원을 못 벌어요. 그렇게 돈을 버는데 병원에서 쓰면 아깝잖아요. 산재 처리도 안 되더라고요. 도저히 앉아있을 수도 없어서 그만뒀어요. 그때 인생을 많이 배웠어요. 스무살 형들이 저보다 더 힘든 집안에서 커서 공장에서 일했어요. 스무살이면 엄마한테 투정할 나이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인생을 배웠어요."
-대작에 많이 출연했던데요.
"솔직히 병풍 역으로 많이 나왔어요. '베를린'도 그랬고 '마스터'도 그랬고. 안 보이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 작업을 하면 이병헌 선배님이나 하정우 선배님 같은 분들을 보잖아요. 그거 자체로 공부예요."
-드디어 '보안관'으로 두각을 드러냈죠.
"'보안관' 시사회에 350명을 불렀어요.(웃음) 그런데 티켓을 그렇게 확보할 수가 없잖아요. 티켓 180장을 구했어요. 그래도 모자라니까 성민 형이나 다른 형들한테 부탁을 해서 220장으로 뺐죠. 결국 세 명 부를 거 두 명 불러서 어떻게 맞췄어요."
-'보안관' 덕분에 예능도 시작했어요.
"역할이 작으니까 주인공이 있는데 오버가 될까봐 홍보에 안 나섰어요. 제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지금까지의 행보에 아쉬움은 없나요.
"10년 전에 '드림'이라는 드라마 주인공을 맡게 됐어요. 드라마를 1년 준비했는데 출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예요. 오히려 그때 잘 됐으면 자만하며 무너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살아온 인생이 지금의 긍정적 태도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oins.com 사진=김민규 기자 영상=박찬우 기자 영상편집=민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