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도 그리던 월드컵, 선수 시절 밟지 못했던 그 '꿈의 무대'를 지도자로 처음 밟게 된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언감생심 기대도 하지 않던 월드컵에 기적적으로 '막차'를 타고 탑승해, 하필이면 자신이 뛰었던 나라와 맞붙게 된 남자도 있다. 신태용(48)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과 스웨덴 리그 출신 문선민(26·인천 유나이티드) 얘기다.
신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18일(한국시간) 밤 9시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F조 1차전 스웨덴과 경기를 치른다. 디펜딩 챔피언이자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 독일, 북중미 강호 멕시코, 그리고 북유럽의 복병 스웨덴과 한 조에 묶인 한국으로선 그 중 가장 '해볼 만한' 상대가 바로 스웨덴이다. 스웨덴과 첫 경기 결과에 따라 16강 진출 여부가 갈릴 수도 있는 만큼, 이날 경기서 어떤 성적을 거두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선수로 못나선 월드컵, 감독으로 첫 경험
신 감독에겐 특히 이번 스웨덴전이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선수 시절 K리그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프로 무대에 데뷔하고, 1996년 득점왕과 2009·2011년 최우수 선수(MVP)에 뽑히는 등 화려한 시절을 보낸 신 감독에게 한으로 남아있는 대회가 바로 월드컵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독 월드컵 출전과 인연이 없었던 선수다. 연령대별 대표팀을 거쳐 1992년 성인 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신 감독은 K리그에서 검증된 활약을 펼치며 1997년까지 A매치에 꾸준히 나섰다. A매치 23경기 출전 3골을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월드컵과는 길이 엇갈렸다. 1994 미국 월드컵과 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모두 태극마크를 달 기회를 얻지 못했다. K리그의 '레전드'로 자부심이 깊었던 만큼, 월드컵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신 감독의 커리어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신 감독 스스로도 "선수로서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지난 7월 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뒤 지금까지 달려온 신 감독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월드컵 데뷔전을 앞두고 있다. 지도자 인생을 시작한 뒤 신 감독이 얻은 가장 큰 기회다. 가장 큰 위기이기도 하다. 소방수로 급하게 선임됐지만 성적을 내지 못하면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는 게 대표팀 감독직인 만큼 사실상 자신의 '목'을 걸고 치르는 사령탑 데뷔전인 셈이다.
압박과 부담 속에서도 바라보는 건 오직 하나 뿐이다. "선수로서 가지 못한 월드컵에 감독으로서 가서 더 높은 곳까지 가라고 만들어진 기회 같다." 신 감독이 감독 취임 기자회견 때 한 말이다. '월드컵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불신의 눈빛을 보내고 있지만, 꿈에 그리던 무대에 첫 발을 내딛은 신 감독은 당당하다.
3부라고 무시말라, '스웨덴통' 문선민이 있다
문선민의 발탁은 신 감독의 월드컵 청사진에 포함되지 않은 그림이었다. 예비 명단 28인에 이름이 올랐을 때만 해도 모두들 '한 번 실험해보고 사라질 카드'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권창훈(24·디종) 이근호(33·강원 FC)의 잇딴 부상으로 뜻밖의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문선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다. 그는 처음 나선 A매치였던 온두라스와 평가전에서 골을 넣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최종명단 23인에 이름을 올려 생애 첫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됐다.
이제 그는 깜짝 발탁에 이은 깜짝 데뷔를 노린다. 첫 상대는 문선민이 너무나 잘 아는 스웨덴이다. 문선민은 2011년 나이키에서 주최한 축구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입상해 다음 해인 2012년 1월, 스웨덴 3부리그 외스테르순드 FK에 입단했다. 입단 첫 해 16경기 2골로 활약 자체는 크게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으나 팀은 2부리그로 승격했고, 이후 이적과 임대를 거쳐 2016년까지 스웨덴에서 뛰다가 그해 12월 K리그 인천에 입단하며 '스웨덴리거' 생활을 접었다.
스웨덴에서 보낸 5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스웨덴 축구를 내부에서 경험하고 또 지켜봤던 문선민의 경험은 팀에 매우 소중하다. 문선민은 "내가 알던 스웨덴과 지금의 스웨덴은 변함 없이 여전하다. 이번 페루와 평가전에서도 내가 아는 모습들이 많이 나왔다"고 '스웨덴통'다운 자부심을 보였다. 신 감독과 코칭 스태프는 아예 선수단 전원이 모인 전체 미팅 때 문선민을 앞에 세우고 스웨덴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또 스웨덴을 전담 분석한 차두리(38) 코치와도 자주 얘기를 나눴다. 차 코치는 문선민에게 "너는 죽어라 전방압박을 하고 상대 수비를 괴롭히면서 지치게 만들어라, 그게 네 장점이다"라고 기운을 북돋아주기도 했다.
이처럼 유럽이라곤 해도 아무도 몰라주는 스웨덴의 3부리그에서 뛰며 5년을 버텨온 문선민에게 스웨덴전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선발로 나설 가능성은 적지만 경기 양상에 따라 후반 교체로 투입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선민은 "만약에 내가 뛰게 된다면 단 1분 1초라도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 팀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경기장 안에서 모든 걸 보여드리겠다"고 다부진 각오와 함께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