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수와 곽윤기(이상 25·고양시청). 둘은 2010년 이후 한국 남자 쇼트트랙을 이끈 대표 선수들이었다. 이정수는 밴쿠버올림픽 쇼트트랙 1000·1500m 2관왕에 올라 혜성처럼 등장했다. 곽윤기도 2012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을 거뒀던 에이스였다.
소치 겨울올림픽에서는 이들을 볼 수 없었다. 선발전 때 이정수는 장염, 곽윤기는 발목 부상 때문에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며 대표에 뽑히지 못했다. 이들이 있었다면 남자 쇼트트랙 노메달의 치욕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소치 올림픽 3관왕에 올랐던 빅토르 안(29·한국명 안현수)의 아버지 안기원 씨도 “이정수, 곽윤기가 올림픽에 나왔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다시 태극마크를 달고 돌아왔다. 지난 6일 끝난 2014~15 시즌 쇼트트랙 대표 선발전에서 곽윤기는 종합 6위, 이정수는 8위에 올라 상위 8명에 주어지는 대표 상비군 자격을 얻었다. 오는 9월 열릴 최종 선발전에서 상위 6위 안에 들면 2014~15 시즌 월드컵, 세계선수권 등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둘을 16일 경기도 고양 어울림누리 빙상장 앞에서 만났다.
- 태극마크를 다시 달게 됐다.
곽윤기(이하 곽)= “지난 시즌 선발전에 탈락해서 동생들한테 잡히면 어쩌나 했다. 정말 잘 타는 선수들이 많았는데 내가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게 하는구나’ 싶었다(웃음). 희망을 가졌다.”
이정수(이하 이)= “솔직히 나는 ‘8명 안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선발전 방식이 바뀐 게 오히려 좋았다. 크게 부담 갖지 않고 경기를 치렀다.”
소치에 가지 못했던 이들은 제3자의 입장에서 겨울올림픽을 봤다. 소속팀 동료와 치킨을 먹으면서 응원했다. 이들이 본 소치 올림픽은 어땠을까.
- 소치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부진했다.
곽= “링크장에서는 경쟁해도 모두 친한 동료이자 동생이다. 진심으로 메달을 따기 바라며 열심히 응원했다. 떨려서 그랬는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같아 너무 아쉬웠다.”
이= “올림픽 같지 않았다. 경기 때마다 실수가 생기며 캐나다의 찰스 해믈린같이 잘 타는 선수도 금메달을 1개밖에 못땄다. 쟁쟁한 선수들이 얼마나 잘 탈 지 기대했는데, 김샜다.”
- 빅토르 안이 3관왕에 올랐다. 어떻게 봤나.
곽= “그런 좋은 선수와 경쟁해서 이기는 게 목표였는데, 그걸 못해 마음 아팠다. 잘하긴 정말 잘 하더라. 실력은 정말 예전 못지 않았다.”
이= “대단했다. 포기하지 않고, 외국 국적을 선택하면서까지 근성있게 목표 의식을 갖고 좋은 성과를 냈다. 다만 현수형한테 관심이 쏠려 한국 선수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 안타까웠다.”
둘은 중학교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지만 잠시 서먹했던 때도 있었다. 2010년 3월 승부 담합 문제로 두 선수 간에 폭로전이 펼쳐졌다. 이정수가 코칭스태프 압력으로 세계선수권 개인전에 나서지 못했던 사실이 알려진데 이어 2009년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승부를 짜고 경기를 한 의혹이 불거졌다. 곽윤기는 "선발전 때 이정수가 도와달라고 해서 도왔다"고 주장한 반면 이정수는 “사실이 아니다”고 맞섰다. 빙상연맹은 둘에게 선수 자격정지 6개월 징계를 내렸다. 2010년 4월에 지인의 주선으로 화해는 했지만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 둘 사이에 큰 아픔이 있었다.
이= “화해한 뒤에도 2011~12 시즌 전까지는 솔직히 되게 어색했다. 인생에서 제일 친했던 친구와 그렇게 되니 ‘어떻게 회복할까’하고 걱정스러웠다. 그러다가 동료들과 같이 위닝 일레븐이라는 축구 게임을 했다. 서로 웃고 장난스럽게 게임을 하며 말문이 다시 트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속시원하게 다 털었다.”
곽= “게임이 우리를 다시 살렸다(웃음). 팀 게임을 하면서도 같이 편먹고 이기기도 했다. 게임하면서 정도 다시 생겼고, 우리 관계도 모든 게 다 풀렸다.”
곽윤기가 지난 1월 고양시청으로 이적하면서 둘은 실업팀에서 한솥밥을 먹게 됐다. 곽윤기는 “너무 좋다. 서로 장단점이 다르다보니 배우는 것도 많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더 즐겁게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정수도 “윤기 덕분에 오늘날의 나도 있었다. 앞으로 더 재미있을 것 같다”며 기대했다.
이들의 새 목표는 4년 뒤 평창올림픽이다.
- 대표팀에서 둘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 “예전에는 우리가 막내였다. 이제는 고참이다. 솔직히 적응 안 된다. 늙었다는 소리도 듣는다.(웃음) 팀 분위기가 좋아야 성적도 좋다. 9월까지 경쟁을 해야 하면서도 너무 심각하게만 받아들이지 않고 가족같이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곽= “우리가 고참급에 속하는 게 정말 이상하다(웃음). 대표팀에 가면 모두 예민해지고 마음가짐 자체도 달라진다. 그래도 그런 분위기에서 편하고 신나게 운동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이번에 들어온 상비군 선수 모두 열심히 운동에만 전념할 선수들이라 기대가 크다.”
- 이제 4년을 함께 더 뛰어야 할 것 같다.
이= “대표팀에 다시 발탁된 게 시작이라면 평창올림픽은 끝이다. 시작과 끝을 윤기와 함께 할 수 있어 고맙고 기쁘다. 서로 다치지 않고, 멋지게 올라가서 평창 올림픽 쇼트트랙 결승전에 나란히 스타트에 서고 싶다. 윤기야! 굉장히 멋있을 것 같지 않아?”
곽= “정말 부상 당하면 안 돼. 작년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우리 아픈 기억도 다 잊고 마지막에는 좋은 선수로 기억에 남도록 계속 달려보자. 서로서로 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