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석상이 아니고서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이기에 관객에게 고수는 곧 작품 속 캐릭터였다. '백야행'(박신우 감독)의 살인사건 피해자의 아들, '초능력자'(김민석 감독)의 초인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사내, '고지전'(장훈 감독)의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는 군인, '집으로 가는 길'(방은진 감독)의 마약범으로 몰린 여자의 남편 등 항상 아픔과 상처를 가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고수는 언제나 가까이 하기 힘든 '사연 많은 남자'였다.
하지만 24일 개봉을 앞둔 '상의원'(이원석 감독) 속 고수는 다르다. 조선시대 왕실의 의복을 만들던 기관인 상의원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천재 의복 디자이너 이공진 역을 맡았다. 격식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공진은 내내 능청스로운 표정과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웃음을 유발한다. 기생 무릎에 누워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봐왔던 고수가 맞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눈발이 흩날리던 12월 오후 만난 고수에게서는 과거 그에게 느껴졌던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에는 우울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일부로 입을 닫으려 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소통을 해보려 한다"라며 계속해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에서 밝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처음으로 긴 머리를 한 것 같다.
"극중 긴 머리는 가발이 아니라 진짜 내 머리카락이다. 이번 영화를 위해 작년 10월부터 계속 길렀다. 처음 출연하는 사극인데,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가발보다 내 진짜 머리카락이 더 나을 거 같더라. 평생을 머리를 안 길러 봤으니 이번 기회에 길러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극중 조선시대 패셔니스타로 나오는데, 실제 패션 감각은 어떤지.
"평소에 그냥 무난하게 입는 편이다. 별로 튀지 않는 의상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화려하고 튀는 옷도 많이 입었는데, 나이를 하나 둘 먹으니 그냥 무난한 스타일이 최고더라."
-극중 바느질하는 장면은 전부 본인이 한 건가.
"전부 내가 했다. 손만 클로즈업된 장면도 전부 내가 연기한 거다. 이번 역할을 위해 두 달 정도 전통한복을 만드는 교수님께 직접 바느질을 배웠다."
-원래 손재주가 좀 있는 편인가 보다.
"옷에 떨어진 단추를 직접 다는 정도다. 근데 손을 정말 잘 딴다.(웃음) 워낙에 잘 체해서 예전부터 촬영 현장에 바늘을 가지고 다니며 직접 손을 따거나 스태프들도 따줬다."
-타고난 천재 공진(고수 역)과 노력형 천재 조돌석(한석규 역), 두 캐릭터 중 본인은 어디에 더 가깝나.
"당연히 노력형이다. 세상에 천재는 없는 것 같다. 예전에는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정말 천재인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들이 그만큼 연기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배우의 임무인 것 같다."
-선배인 한선규, 후배인 박신혜·유연석, 누구와 연기 호흡이 더 편했나.
"선·후배 할 거 없이 모두 좋았다. 한선규 선배님과는 '백야행'(09) 이후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 선배님은 늘 한결같은 사람이다. 기회가 된다면 선배님과 또 한번 호흡을 맞추고 싶다. 신혜 씨와 연석 씨에게는 그 분들이 날 편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대하려 했다. 잘 됐는지 모르겠지만.(웃음) 나이 몇 살 더 많고, 경력이 조금 더 있다고 후배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
-촬영이 없는 날에는 주로 뭘 하나.
"정말 아무것도 안한다. 어렸을 때는 이것저것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별로 취미가 없다. 그래서 무언갈 새로운 걸 배울 수 있는 작품에 자꾸 욕심이 간다. '상의원'을 촬영하면서 바느질을 배웠듯이."
-과거에 비해 수다스러워진 것 같다.
"말이 정말 많이 늘었다. 과거에는 일부로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말의 힘이 엄청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말을 조심하려고 하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고 여러 삶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가 정말 소통을 안 하고 살았구나 싶더라. 그래서 열심히 말을 하려고 한다."
-이번 캐릭터는 밝고 경쾌한데, 전작들에서는 줄곧 우울하고 어두운 역을 맡았다.
"20대 때 난 굉장히 우울한 사람이었다. 아주 슬펐다. 원래 난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남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는 일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우울해졌다. 그런 것들이 역할을 선택할 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만약 그때 밝은 역을 했더라도 우울하게 보였을 거다. 그때는 벼랑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역을 선호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든 배우다.
"불러주는 데도 없다. 하하. 20대 때는 예능 프로그램에 몇 번 출연했었는데, 때 워낙 말을 잘 못했고, 또 말수가 없는 이미지니까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