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앙지는 2015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캔자스시티였다. 뚜렷한 강점이 없는 선발진과 압도적인 최강 불펜진을 양 손에 쥔 팀이 우승을 했다. 30개 구단 프런트오피스는 ‘강력한 불펜이 승리의 열쇠’라는 아이디어에 한층 주목하게 됐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구단이 많아지면, '앞서가겠다'는 동기가 생긴다. 과감한 투자를 하는 팀들이 나왔다.
보스턴과 휴스턴이 대표적이었다. 보스턴은 특급 마무리 투수 크레이그 킴브렐을 데려오면서, 샌디에이고에 4명의 유망주를 내줬다. 휴스턴은 한술 더 떴다. A급 마무리 투수로 부상한 켄 자일스를 포함, 2명의 선수를 데려왔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필라델피아에 무려 5명의 선수를 내줬다. 뉴욕 양키스 역시 신시내티에 4명의 유망주를 내주며 시속 170km 광속구를 던지는 아롤디스 채프먼을 데려왔다. 그러나 보스턴, 휴스턴이 내준 선수들에 비해선 ‘급’이 많이 떨어졌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세 팀 중 유일한 승자는 양키스처럼 보인다. 휴스턴이 데려온 자일스는 개막하기도 전에 마무리 보직에서 강등됐다. 4월에는 평균자책점 9.00을 기록하는 대형 참사를 냈다. 반면 필라델피아로 넘어간 우완 투수 빈센트 벨라스케스는 16탈삼진 완봉승을 거두며 휴스턴의 속을 더욱 쓰리게 했다.
보스턴 역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킴브렐은 평균자책점 3.55를 기록해 ‘특급’ 명성에 미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무릎 수술을 받아 3~6주 결장이 불가피해졌다. 반면 넘어간 유망주 중 2명은 샌디에이고 내부 유망주 순위 1위, 3위에 올랐다.
보스턴은 특급 마무리 투수 크레이그 킴브렐을 데려오면서, 샌디에이고에 4명의 유망주를 내줬다.
반면 양키스가 내준 유망주 4명은 별다른 성장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채프먼은 한 달 결장했지만, 복귀 후 싱싱하게 쾌투하고 있다. 7월 24일 현재, 양키스는 내년 FA를 앞두고 있는 채프먼을 다른 팀에 넘기고 유망주를 받아오려 하고 있다. '야구판 창조경제'가 따로 없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불펜 투수에 대한 고평가 기조는 6개월 만에 벽에 부딪힌 모양새다. 보스턴이 애리조나로부터 마무리 브래드 지글러를 데려오긴 했지만, 현재 수장인 데이브 돔브로스키 사장의 ‘과감한 베팅’ 성향이 한몫했다는 평이 나온다. 마이애미는 샌디에이고로부터 마무리 페르난도 로드니를 데려왔는데, 대가로 생각보다 좋은 유망주를 넘겼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결국 불펜 투자에 대한 시장의 선호도는 ‘호감’에서 ‘비호감’으로 다시 바뀐 것이다. 이전까지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불펜 투수에 대한 대형 투자를 선호하지 않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선발 투수에 비해 불펜 투수의 기여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다. 간단하게 이닝 수만 비교하면 된다. 이 점은 최근 강력한 불펜진을 갖춘 캔자스시티의 우승, 연이은 투고타저, 투수들의 구속 상승 등으로 어느 정도 상쇄돼는 듯 했다.
둘째, 불펜 투수들의 연도별 성적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즉, 상품 가치의 변동성이 너무 높다. 이는 불펜 투수라는 상품의 고유한 특성과도 같다. 1년에 선발 투수 이닝의 절반도 소화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선발 투수와 달리 불펜 투수의 성적에는 상당한 양의 운과 상황 변수가 영향을 미친다.
올 시즌 각 구단 불펜 투수 기여도를 보면 이런 변동성, 불안정성이 아직도 걷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불펜 투수의 ‘공과’를 측정하는 지표로는 WPA(Wins Probability Added·추가한 승리확률)가 있다. 투수의 WPA는 등판 전후로 팀의 승리확률 변화량을 계산해 누적한 값이다. 위기 상황을 극복해내거나, 별다른 위기를 자초하지 않는다면 양의 값이 더해진다. 즉, 불펜진의 WPA가 음수인 팀은 투수들이 계속 ‘방화’를 저질렀다는 뜻이 된다. 대표적인 팀이 지난해 -1.49로 전체 25위에 오른 LA 다저스다. 반면 막강 불펜을 자랑했던 세인트루이스는 8.79로 전체 3위에 올랐다. 그만큼 불펜진이 ‘위기 탈출 전문가’였다는 뜻이다.
두 팀은 지난 겨울 불펜진에 별다른 큰 보강을 하지 않았다. 다저스는 1년 400만 달러에 조 블랜튼을 데려왔다. 세인트루이스는 2년 최대 1100만 달러에 오승환을, 2년 750만 달러에 조나단 브록스턴을 데려왔다. 그런데 올해 다저스와 세인트루이스의 불펜 WPA는 현재 1.93, -1.01로 각각 9위와 24위에 올라있다. 1년만에 처지가 뒤바뀐 것이다.
다저스는 블랜튼이 마당쇠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다. 또 애덤 리베라토레, J.P. 하웰 등이 작년보다 나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팀 불펜 평균자책점은 3.91에서 2.97로 1점 가까이 줄어들었다. 반면 세인트루이스는 철벽 마무리 트레버 로젠탈, 중간 계투 세스 마네스가 심각하게 무너졌다. 오승환이 좋은 피칭을 하고 있지만, 기보유했던 에이스 카드가 악재로 돌변한 여파가 너무 크다. 단순히 평균자책점을 봐도 2.82에서 3.58로 0.76이나 상승했다.
다저스는 블랜튼이 마당쇠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다
다저스와 세인트루이스의 사례처럼, 불펜 투수들의 성적은 선발 투수나 주전 야수들에 비해 앞날을 예상하기가 너무 어렵다. 휴스턴의 경우, 데려온 자일스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기존 자원인 윌 해리스와 루크 그레거슨 등이 작년보다 더 안정감있는 활약을 하고 있다. 그 결과 WPA 순위가 지난해 17위에서 올해 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유망주 또는 1000만 달러 이상의 투자를 한 팀 중에서 이렇게 불펜의 WPA 순위가 5계단 이상 오른 팀은 휴스턴, 오클랜드, 디트로이트, 토론토, 시애틀, 보스턴 뿐이다. 그나마 ‘거액 투자’ 중에서 어느 정도 제 몫을 해낸 이는 디트로이트의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시애틀의 스티븐 시셱이 거의 전부다.
이렇게 불펜 투수라는 상품의 변동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특급 마무리’에 큰 투자를 하는 전략이 쉽게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구나 메이저리그는 올해 홈런 숫자가 급증하며 게임의 지형도가 바뀌는 중이다. 불펜 투수에 대한 고평가는 투고타저 양상과 함께 찾아왔다. 다시 타고투저 방향으로 균형이 맞춰진다면, 계산 역시 달라질 수도 있다.
지난 수 년간 FA 불펜 투수에 대한 다년·고액 계약이 유행인 KBO리그에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박기태(비즈볼프로젝트) 지속적인 스포츠 콘텐트 생산을 목표로 하는 젊은 스포츠 연구자들의 모임. 일간스포츠와는 2014년부터 협력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