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디애나주 볼주립대를 졸업한 해거티는 200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지명(시카고 컵스)을 받은 유망주 출신이다. 계약금만 무려 100만 달러(약 11억2000만원). 탄탄한 신체 조건(201cm·104kg)을 바탕으로 시속 150km대의 빠른공을 던졌다. 입단 첫해 마이너리그 하위 싱글 A에서 평균자책점 1.13을 기록했을 때만 해도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그러나 부상에 쓰러졌다. 이듬해 수술대(팔꿈치 인대 접합)에 올랐다. 긴 재활을 거쳐 2004년 복귀했지만 이전 모습을 잃어버렸다. 입스(Yips·두려움 때문에 발생하는 불안 증세)가 발목을 잡았다.
컨트롤이 극도로 흔들렸다. 2005년 하위 싱글 A에서 9이닝당 볼넷(BB/9) 40.5개로 무너졌다. 6⅔이닝을 소화하면서 볼넷 30개를 헌납했다. 2007년에는 9이닝당 볼넷이 54개(1⅓이닝 8볼넷)까지 치솟았다. 회생이 불가능했다. 결국 2008년 독립리그를 끝으로 공을 놓았다.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 이후 잊힌 유망주가 된 사연은 메이저리그에 차고 넘친다. 여기까진 해거티도 비슷하다. 반전은 2009년 5월 암연구원인 레이첼 렘펠과 결혼한 뒤 학교로 돌아가면서 시작됐다.
야구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애리조나주립대 건강 설루션 대학에서 공부해 컨디셔닝 자격증을 획득했고,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 X2 애슬레틱 퍼포먼스(X2 Athletic Performance)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선수들 부상 방지와 훈련 방법 전파에 힘썼다.
꾸준한 운동과 심리적 안정은 놀라운 변화를 예고했다. 회사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팔이 편안해지고 힘이 붙는 느낌을 받았다. 카메라 및 레이더 시스템인 랩소도 장치를 이용해 구속과 공의 회전 등을 측정했을 때는 확신을 가졌다. 주변에선 '도전'을 이야기했고, 지난 1월 메이저리그 19개 구단 40여 명의 스카우트 앞에서 테스트받았다. 무려 98.5마일(158.5km)의 패스트볼을 던졌다. 젊었을 땐 꿈도 꾸지 못한 구속이 스피드 건에 찍혔다. 그 결과 컵스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됐다. 17년 전 신인 드래프트에서 자신을 찍어 준 친정팀으로 돌아왔다.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 ESPN에 따르면, '38세 생일 이후 빅리그 무대를 밟은 선수'는 역대 8명이다. 영화 '루키'의 주인공으로, 1999년 늦깎이 신인으로 화제를 모았던 짐 모리스의 메이저리그 데뷔 당시 나이는 35세. 해거티가 3세 더 많다. 현재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준비하는 해거티는 일간스포츠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먼 길을 돌아온 만큼 여기서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각하기 힘들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저 감사하고 행복한 생각뿐이다. 다시 메이저리그 팀 유니폼을 입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야구장에 나오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컵스 선수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 복수의 팀이 계약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컵스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많은 팀이 관심을 보여 줬지만, 그중 가장 적극적인 팀이 밀워키와 컵스였다. 선택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시 컵스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싶었다. 과거 컵스 구단에서 정말 많은 도움을 줬다. 팀에서 방출돼 독립리그로 간 것도 구단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이었다. 독립리그에서 몸을 열심히 만들면서 예전의 좋은 모습을 되찾으면 다시 불러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내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 치명적인 입스에 걸렸다. 돌이켜 보면 원인이 있었을까. "2002년에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2003년 스프링캠프 때 피칭하는데 팔꿈치에서 갑자기 '뚝' 하는 소리가 나더라. 인대가 끊어진 것이다. 토미존 서저리(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를 받고 재활하는데, 그 과정이 정말 힘들었다. 재활하면서 통증이 반복적으로 왔고, 기간도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러면서 몸과 마음이 지치기 시작했다. 정확히 언제 입스에 걸렸는지 말할 순 없지만, 오랜 기간 재활을 마치고 공을 다시 잡았을 때 예전의 좋았던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확한 원인은 지금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제구 불안에 시달렸다."
- 2008년 독립리그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당시 미련은 없었나. "자신에게 매우 실망했다. 분명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 많이 실망했다. 그 후 야구도 보지 않았고 야구공도 잡지 않았다. 야구를 잊고 싶었던 시절이다."
- X2 애슬레틱 퍼포먼스를 설립한 계기가 있다면. "야구를 그만둔 뒤 애리조나주립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전공은 스포츠 과학이었다. 선수 시절부터 트레이닝에 관심이 많았다. 졸업과 동시에 체력전문가 자격증도 취득했고, 이후 2년간 여러 트레이닝 센터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설립하게 됐다."
- 그 활동이 복귀에 어떤 영향을 줬나. "웨이트트레이닝부터 유연성과 가동성까지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체계적인 체력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투구 메커닉을 비롯한 다양한 부문을 첨단 기계로 측정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지만, 센터를 직접 설립하고 운영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트레이닝뿐 아니라 여러 가지 공부를 많이 하게 되더라. 배운 것을 직접 체험해 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속이 빨라진 것에 대해 궁금해하는데, 공부하고 배운 것을 몸에 하나씩 적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향상됐다. 선수 시절 때 알았으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서 오진 않았을 것이다."
- 한국의 어린 선수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인데. "우리팀 마이너리그에 한국 출신의 허재혁 트레이너가 있다. 허 트레이너를 통해 오면 할인해 주겠다.(웃음) 프로 선수의 꿈을 품은 아이들이 온다면 내가 배우고 경험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 다시 야구선수로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계기는. "센터를 운영하면서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운드에 올라 공을 힘껏 던지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공에 힘이 붙기 시작하더라. 나이는 늘어 가는데 공은 오히려 좋아지는 것이었다. 트레이닝법이나 투구 메커닉을 내 몸에 적용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그때부터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다시 한번 도전하라'고 말해 줬고 자신감을 찾았다."
- 재기하는데 아내의 영향도 있었을까. "너무 고맙다. 처음 트레이닝 센터를 운영할 때 아내가 많은 지원을 해 줬다. 아내는 현재 임상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안정적인 직업이어서 트레이닝 센터라는 새로운 분야에 안심하고 도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신의 한 수였다. 내가 만약 평범한 회사원이었다면 어떻게 다시 컵스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을까."
- 2002년의 해거티와 2019년의 해거티, 차이가 있다면. "확실히 지금의 내가 더 좋은 투수다. 비록 나이의 숫자는 많아졌지만 공은 그때보다 훨씬 좋다. 구속도 더 빠르고 변화구도 예리해졌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혔던 제구 불안도 이제는 전혀 없다."
- 앞으로 언제까지 야구를 할 것인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해 다시 야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목표는 일단 시즌 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야구를 하고 싶다. 먼 길을 돌아서 온 만큼 여기서 쉽게 포기하고 쉽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