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의 시나리오 쏠림 현상이 여전하다. 송강호·강동원·하정우·이병헌, 이른바 'A급' 주연배우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쉽사리 투자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여배우가 설 곳을 잃었다는 최근 충무로에서 남자배우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름대로 이름을 알렸고, 한류스타라 불리더라도 제대로 된 영화 시나리오를 받기 힘들다. 극소수 'A급' 배우들이 거절한 시나리오를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데다, 이들과 출연료가 현저히 차이난다. 출연을 결정한다해도 투자가 잘 들어오지 않아 제작에 어려움을 겪는다. 극장에 영화를 걸기까지 오랜 시간 높은 산 몇 개를 넘어야만 하는 셈이다.
반면, 송강호·강동원·하정우·이병헌은 일년 내내 작품 대기 중이다. 지난해 '밀정(김지운 감독)', 올해 '택시운전사(장훈 감독)'을 선보인 송강호는 차기작이 무려 세 편이나 결정돼 있다. '마약왕(우민호 감독)'은 촬영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이어 '기생충(봉준호 감독)'이 촬영에 들어간다. 잠시 제작이 중단됐던 '제5열(원신연 감독)'도 내년 상반기 다시 크랭크인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최소 내후년까지는 송강호의 영화가 줄줄이 극장에 걸린다. 마찬가지로 강동원은 '골든슬럼버(노동석 감독)'·'1987(장준환 감독)'·'인랑(김지운 감독)'으로 이미 촬영을 마쳤거나 촬영 중이며, 하정우는 '1987'·'신과 함께(김용화 감독)'·'PMC(김병우 감독)'로 끊임없이 관객을 찾아온다. 이병헌은 추석 연휴 개봉하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과 최근 크랭크인한 '그것만이 내 세상(최성현 감독)'이 남아있다.
모든 영화가 이들 네 배우, '송-강-하-이'를 캐스팅할 순 없다. 이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작품은 차선책으로 다른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건넨다. 문제는 투자다. '송강하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투자를 받기 힘들다. 때문에 한 영화를 크랭크인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이름이 잘 알려지고 연기력도 인정받은 배우 B지만 막상 캐스팅하니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투자사로부터 'B로는 안 된다'는 말만 돌아온다.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배우들은 더 거센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A급' 배우들과 차별 때문에 영화를 포기하고 드라마만 출연하는 이들도 여럿이다. 한류스타로 이름을 날린 배우 C의 관계자는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인기가 높아 드라마 캐스팅 제안은 많이 들어온다. 유독 영화판에서는 찬밥 신세다.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받아보기 힘들다"며 "'A급' 밑으로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출연료도 뚝 떨어진다. 그렇다고 작은 영화에만 얼굴을 비칠 순 없어 영화 출연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캐스팅 시장 독과점은 올바른 현상이 아니다. 일부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들에게만 관심이 쏠리면 피해자는 결국 관객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모두가 'A급' 배우들에게만 매달린다면, 중간급 배우들에겐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종국엔 영화의 다양성 저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