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프로축구 전통의 명가 맨유에는 유례없는 '등번호 쟁탈전'이 벌어질 뻔했다. 유럽 최고의 장신 스트라이커 이브라히모비치가 최근 맨유에 입단하면서 비롯된 일이다. 사건의 발단은 맨유 팬들로부터 '왕(King)'이라는 별명을 얻은 에릭 칸토나(50·은퇴)다.
19일(한국시간)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칸토나는 "맨유의 왕은 단 한 명뿐이다. 네가 원한다면 왕자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원한다면 내가 달던 등번호 7을 가져가도 좋다. 환영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며 이브라히모비치를 자극했다. 이어 "왕은 이만 떠난다. 왕자여, 만수무강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등번호 7번은 맨유의 에이스들만 달았던 등번호다. 조지 베스트를 시작으로 브라이언 롭슨, 데이비드 베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유럽 축구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선수들만이 7번을 달고 맨유 홈 구장 올드 트래퍼드를 누볐다.
칸토나 역시 현역으로 뛰던 1990년대(1992~1997년) 맨유의 7번을 달았다. 그는 뛰어난 실력뿐만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와 화끈한 성격까지 갖춰 홈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맨유 유니폼을 입고 185경기에서 82골을 터뜨린 칸토나는 맨유 역사상 최고의 주장으로 꼽힌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야유하는 상대 팀 팬을 보고 관중석에 뛰어들어가 날라 차기를 하거나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선수에게 더 심한 반칙으로 보복하는 등 사건 사고도 쉬지 않고 일으켰다.
그런데 이런 칸토나도 이번 만큼은 상대를 잘못 고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존심을 싸움을 건 이브라히모비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상남자'이기 때문이다. 이브라히모비치는 팀 선배 칸토나의 '얄미운 공격'에 즉답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브라히모비치는 "칸토나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면서 "나는 맨유의 왕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맨유의 신이 될 것"이라는 멋진 포부로 응수했다.
이 사건을 두고 영국 현지 언론에선 칸토나가 새카만 후배에게 '한 방' 맞았다는 평가다.
키 195cm의 우월한 신체조건을 자랑하는 이브라히모비치는 칸토나 못지않게 화려한 축구실력과 입담을 자랑한다. 이브라히모비치는 2015~2016시즌 파리 생제르망(프랑스)에서 뛰며 38골을 터뜨려 역대 한 시즌 최다골 기록(종전 1977~1978시즌 카를로스 비안치·37골)을 넘어섰다. 38골은 2위 알렉상드르 라카제트(25·리옹)의 21골의 2배 가까운 기록이다.
반면 급한 성미와 넘치는 자신감 때문에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동료에게 패스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당신이 나보다 축구를 더 잘 알기라도 한다는 말인가?"라며 두 눈을 부릅떠서 기자의 기를 죽이는가 하면 이번 맨유 이적을 앞두고도 소속팀의 공식 발표에 앞서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먼저 알리는 기행을 펼쳤다. 그가 즐겨쓰는 3인칭 화법 '나는 즐라탄이다(I am Zlatan)'은 자신의 SNS 아이디와 자서전 제목으로 사용할 만큼 유명하다.
실력이 없는 선수가 이런 특이한 행동을 했다면 축구 팬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정상급으로 분류되는 이브라히모비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브라히모비치는 등번호 7 대신 9번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 22일 자신의 SNS를 통해 "나는 9번을 선택했다"는 말과 함께 맨유를 상징하는 붉은색 바탕에 자신의 이름과 9번이 새겨진 사진을 게재했다. 이브라히모비치 특유의 호탕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간 맨유의 9번은 7번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졌다. 디미타르 베르바토프(35·PAOK)와 루이 사하(38) 등이 9번을 달고 뛰었으나 전설에 가까운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맨유의 9번을 상징하는 선수는 약 60년전 활약한 레전드 바비 찰튼(79) 뿐이다.
하지만 이브라히모비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맨유에서 등번호 9번을 달고 새로운 전설을 써내려가겠다는 각오다. 이브라히모비치는 2001년 아약스(네덜란드)에서 등번호 9와 함께 프로 무대에 데뷔해 전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선수 생활의 시작과 마무리를 9번과 함께 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