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놀이'인가 '일'인가
일간스포츠

입력 2006.01.12 01:12

최근 아이템 대여 중개사이트 출현으로 논쟁가열


내 정성담긴 캐릭터 내 맘대로" 항변에
"게임 가상세계서도 돈이면 통해" 개탄
'빨리빨리' 문화가 현금거래 부추겨
개발사는 '반칙'막는 시스템 검토해야


Player가 될 것인가, Worker가 될 것인가.

네오는 <매트릭스> 에서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중 하나를 삼켜야 했다. 프로도는 <반지의 제왕> 에서 절대반지를 낄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2003년 말, 아이템 논쟁이 치열한 한국. 최근의 사태는 게이머들에게 ‘당신은 왜 게임을 하는가?’ 라고 묻고 있다.

지난 달 말 아이템베이(www.itembay.com)가 온라인게임 아이템 대여중개 서비스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법률적 판단을 떠나, 아이템 현금매매나 대여의 허용여부는 게임이 ‘놀이’인지, ‘일’인지를 가리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이는 비단 국내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지난 달 중순 뉴욕법대와 예일법대 후원으로 이 문제와 관련한 컨퍼런스(The State of Play)가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이템 현금 매매/대여가 게임과 게이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관한 이슈들을 짚어본다.

▲ Player VS Worker

최근 논쟁 속에서 일부 유저들은 게임 속 아이템의 ‘소유권’이 그들에게 있음을 주장한다. 플레이포럼 토론방에 오른 한 유저의 “내 정성이 담긴 캐릭터가 남의 소유란 말이 너무 불쾌하다”는 심경은 많은 유저가 공감한다.

하지만 아이템과 캐릭터에 대한 애착 너머에는 ‘돈벌이’라는 다른 욕망이 숨어있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이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노동의 대가를 정당히 평가해 달라는 이야기다. 물론 그 대가는 현금으로 보상되어야 한다.

모든 유저가 이런 생각으로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도 게이머 중에는 ‘player’와 ‘worker’가 섞여 있다. 또 정성껏 키운 캐릭터는 자기 것이지만 돈 주고 팔 생각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이머도 많다.

하지만 아이템 현금매매/대여가 일반화할 경우, 독야청청 즐겁게 게임 할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대여 시스템의 폭발력을 감안할 때, ‘좋은 장비 빌려서, 그 동안 돈 벌어서 갚으면 된다’는 분위기가 대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터에서는 혼자 놀 수 있지만 공장에서는 혼자 놀기 쉽지 않다.

▲ 부익부, 빈익빈

온라인 RPG를 그만 둘까 고민 중인 김현수 씨(32)는 “현실의 축소판이 돼가는 온라인게임에 짜증이 나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토로했다. 그가 짜증났던 것은 현금을 이용해 아이템을 사서 캐릭터를 키운 다른 유저들 때문이었다.

그가 게임을 통해 바랬던 것은 ‘현실과는 다른 세상’이었지만 게임은 어느새 ‘현실의 연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현실의 ‘부익부, 빈익빈’이 게임 속 ‘부익부, 빈익빈’으로 번지고 있는 것을 몸소 겪으면서 짜증 났던 것이다.

물론 그도 게임 속 아이템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약관에는 게임개발사 것이라고 돼있지만 게임회사가 마음대로 가져갈 수도 없다. 나도 게임 그만 둘 때 팔고 나갈 작정이다.”

하지만 아이템 현금매매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은 온라인게임을 통해 건강하고 튼튼한 캐릭터를 키우려던 그의 꿈을 앗아가는 듯했다. “현실에서도 가진 사람들한테 치이는데 게임 속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정말 게임 할 맛이 안 난다. 좀 페이플레이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빨리빨리’와 레벨 업

레벨 업을 위해 현금을 주고 아이템을 사는 것은 우리 생각만큼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다. 일본 <리니지> 커뮤니티인 ‘리니지 기자클럽’(http://kisha.ath.cx)의 운영자 나시모토 씨(31)는 “일본 유저들 사이에서는 PK는 물론 아이템 현금거래도 거의 없다”고 말한다.

같은 게임을 가지고도 한국과 일본 유저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국인들이 가장 잘 아는 한국어 중 하나는 ‘빨리, 빨리’다. 60년대 이후 체제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근대화가 지상 과제이던 시절, 무조건 빨리 목적에 이르는 것이 중요했다. 편법과 특혜도 눈감아 줬다.

학연, 지연에 얽힌 일종의 매관매직도 용인됐다. 결국 체제경쟁에서 이겼고 근대화는 성공했다. 하지만 룰과 원칙에 따른 페어플레이를 하다가는 손해를 본다는 인식까지 뿌리깊게 뇌리에 박혔다.

온라인게임 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시절부터 시작된 ‘레벨 업을 위해 현금을 주고 아이템을 사는 행위’는 이와 어떤 관계가 없을까. 그것 역시 일종의 매관매직 아닐까.

게임전문가 유현수 씨는 “게임이 현실의 복사판이 되어선 곤란하다. 게임을 통해 배운 협동의 정신과 커뮤니티 문화가 삭막한 현실을 바꿀 수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게임마저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안 가리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그에 따르면 아이템 매매/대여 중개 사이트의 가장 큰 문제는 이 같은 ‘반칙행위’를 마치 정당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부추긴다는 것이다.

▲ 게임개발사의 원죄

아이템 매매/대여 현상에 온라인게임 업체들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분명 약관에는 ‘용서치 않겠다’고 해놓고선 실제 게임 속이나 공식 홈페이지에 오르는 “얼마 주고 삽니다/팝니다”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거의 제재를 못해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게이머들에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뒤늦게나마 약관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게임사에 대해 게이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약관을 지키겠다’는 것까지 비판할 수는 없다. 게이머도 약관에 동의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이템에 대한 비정상적인 수요욕구를 줄이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사정이 다르다고 해서, 반칙이 용인되는 온라인게임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게임 문외한들이 주장하는 식으로 RPG의 정신이나 게임성을 훼손하는 개정은 아니래도 “고급 아이템 착용 시, HP(체력치)를 일정 수준 떨어뜨리거나, 레벨 업에 필적할 만한 재미의 요소를 개발할 것”을 요구하는 온라인게임 전문가들의 지적은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임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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