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0>
일간스포츠

입력 2006.07.21 08:53

야쿠자와 친분 `폭력 조직` 현재 의미와는 달라
레슬링 흥행 위한 방패막이 구실 `윈-윈 전략`

과거의 일을 회상하다 보니 자꾸 야쿠자 얘기가 흘러나오는데 잘은 모르지만 한 번쯤은 스승을 둘러싼 오해를 풀고 싶어서 하는 제자의 말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듣자하니 야마구치구미하면 일본 야쿠자의 대명사가 된 듯하다. 물론 이나가와가이·스미요시가이 등도 큰 세력이다. 1960년대 초 일본에서 레슬링이 한창 흥행했을 때 야쿠자들은 세력 확산을 위해 물고 물리는 접전을 벌였다. 일본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들이 어떤 식으로 접접을 벌였는지 잘 알 것이다.
 
이 가운데 야마구치구미는 워낙 일본 언론에 많이 등장했고,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조직이다. 스승 역도산이 이 조직의 오야붕과 유대를 맺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승이 무슨 조직의 오야붕과 유대를 맺었다면 당장 폭력배와 연관 있는 것인 양 오해하는 데 그런 것이 아니다. 레슬링 흥행을 위해 함께 윈-윈 전략을 택한 것이다.
 
지금 관점에서 생각하면 야쿠자가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당시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당시 야쿠자들은 스스로 우국 조직원 내지 일본의 번영을 위한 우익 단체 노릇을 했다. 스승과 연관됐던 조직인 야마구치구미 오야봉은 다오카 가즈오였다. 다오카와 인연을 맺었던 데는 정건영이 가운데 있어서였다.
 
지난 회에 밝혔듯이 일본 고베·오사카 등 간사이 지방을 제패했던 야마구치구미가 동경으로 진출하려 할 때 도움을 줬던 조직이 동성회였다. 때문에 두 조직 오야붕들은 형제처럼 지냈다. 난 간사이 지방에서 활약했던 이 조직이 어떻게 해서 일본 최대의 조직으로 부상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동성회 도움이 컸다고 생각한다. 당시 도쿄에는 정건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전통 일본 조직이 아닌 재일교포 위주로 구성된 동성회라서 뿌리와 전통을 강조하는 야쿠자 조직과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야마쿠치는 이런 동성회를 무시하지 않았다. 동성회도 조직의 뿌리를 대신하기 위해 그 대안으로 야마구치구미를 선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두 조직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1963년 2월 야마구치와 동성회가 형제의 결연을 맺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후 야마구치를 상징하는 마름모꼴 디자인 속에 동성이라는 두 글자를 넣은 배지를 만든 것을 보더라도 두 조직은 무척 가까웠다.
 
다오카가 스승과 친분을 맺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인연 때문이다. 스승이 정건영과 친분 관계가 돈독했고, 정건영이 당대 최고의 야마구치구미와 형제의 예를 주고받았다면 그 다음 인간 관계가 어떻게 흐르겠는가. 정건영은 자연스럽게 스승에게 다오카를 소개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아가 스승의 레슬링 동업자 나가타 사다오가 있었다. 나가타는 다오카 야마구치구미 회장과 형제의 연을 맺은 사이였다.
 
저마다 나름대로 자신을 의리를 중시하는 진정한 사나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이었기에 수인사를 나눈 뒤에는 마치 10년 지기인 양 친밀한 관계처럼 보였다. 또 당시에는 정·관·재계 할 것 없이 누구나 당대의 영웅 역도산과 친분을 맺고 싶어 했으니 다오카라고 다르겠는가?
 
스승은 다오카를 사업적 파트너만으로 받아들였다. 다오카는 참으로 젠틀맨이었고 양반이었다. 그는 사업적 수완에 눈이 밝았다. 그는 야마구치구미 조직의 방향을 꼭 유흥가 쪽 오락실과 술집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난 다오카를 본 적이 있지만 처음엔 사업가로만 생각했고 훗날 그가 야마구치구미 오야붕이란 사실을 알았다. 다오카는 참으로 스승을 좋아했던 것 같다. 다오카는 스승을 위해 때론 방패막이를 해 줬다. 물론 정건영과도 친했다.
 
스승은 정·관계 인사들과도 손이 닿았다. 이런 관계로 엮어지면서 스승은 일본 최대의 레슬러 프로모터로 급부상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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