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2>
이제 방향을 돌려 야쿠자 얘기보다는 스승 역도산과 나와도 인연을 맺었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얘기다. 스승이 1961년 동경 시부야에 리키스포츠팰리스를 오픈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스승은 리키스포츠팰리스를 개관하면서 프로복싱 도장까지 만들었다. 복싱도 레슬링과 마찬가지로 사각의 링에서 경기를 펼치는 것이라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승은 리키복싱회장도 역임했다.
그때 3명의 재일 한국인이 스승의 제자로 들어왔다. 또 종목이 다른 한 명의 재일 한국인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첫 번째는 코트네다. 스승은 코트네를 복싱 선수로 키우기 위해 스카웃했다. 일본 교토 출신인 코트네는 딱 벌어진 어깨, 호쾌한 성격, 그리고 두둑한 배짱까지 갖춰 사실 복싱보다 레슬링 선수가 더 어울렸다.
지금도 안토니오 이노키와는 둘도 없는 친한 사이로 지내는 코트네는 1974년 중반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영화 제목은 로저 무어 주연의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로 일본인 스모 선수 역을 맡았는데 스모 선수 출신은 아니다.
코트네는 덩치가 좋아 사실은 헤비급 선수였지만 당시 일본에서 복싱을 했던 선수 중 헤비급에 걸맞은 체중을 지닌 선수가 거의 없었던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체급을 낮췄다.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미들급 체중으로 낮춰 1962년 미들급 신인왕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코트네는 몇 년전 한국서 개봉됐던 영화 <역도산> 감수까지 했는데 올 3월 초 일본에 갔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내가 감수했던 내용과 다르게 영화가 제작됐다"며 흥분을 가리앉히지 못했다. 코트네는 지금도 한국 레슬링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후배들 육성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80년대 일본서 활동했던 한국인 레슬러들은 대부분 코트네의 손을 거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 명은 여건부다. 여건부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알밤까기다. 원래 복싱을 하기 위해 도장에 입문했다가 레슬링 선수로 전환했다. 몸집이 크지 않았지만 순발력과 민첩성만은 당대 최고였다. 늘 파이팅이 넘쳤다.
여건부는 요즘 젊은 층에서 말하는 뺀질이였다. 난 스승을 대신해 그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의 귀도 내 귀처럼 구부러져 있다. 내가 만든 것이다. 여건부는 나와 함께 다른 사람을 만나면 "김일 선배님이 내 귀를 이렇게 오므라들게 했다'면서 불평을 쏟곤 했다. 내가 워낙 강한 훈련을 시켜서인지 나 때문에 레슬링을 그만두겠다는 말도 했다.
스승의 도장에 또 한 명의 복싱 선수가 입문했다. 정식 제자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1962년 가을까지 스승 도장에서 운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66년 6월 25일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한국 프로복싱 첫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가 바로 그다.
56년 중반 여수에서 씨름을 하면서 처음 만났던 김기수는 58년 5월 동경에서 한 번 조우했다. 당시 동경에선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 웰터급 한국 대표로 출전, 금메달을 땄다. 그때 내가 나를 찾아온 김기수를 스승에게 소개시켜 줬다. 스승과 같은 함경도가 고향인 김기수는 스승의 특별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스승뿐만 아니라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코트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코트네는 김기수의 스파링 파트너가 돼 주었다. 만약 코트네가 복싱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역시 세계 챔피언이 됐을지도 모른다.
스승 도장에 온 네 번째 한국인은 일본 프로야구 영웅 장훈이었다. <계속>계속>역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