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90>
일간스포츠

입력 2006.09.15 15:19

장영철, 65년 5개국 대회 일본인과 격돌
코너 몰리자 후배들 난입 "레슬링은 쇼" 파문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달 8일 저녁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장영철이 작고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파킨슨과 중풍 등 합병증으로 인해 병마와 싸우고 있어서 건강에 대해 우려는 했지만 막상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하니 허무하기까지 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부산으로 달려갔다. 주변에선 내 건강을 걱정, 만류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인이 9일 오전이어서 서둘러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 병실을 나섰다. 장영철의 시신이 안치된 부산의 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는 동안 그와의 추억이 마치 필름 돌아가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1965년 11월 장영철의 "레슬링은 쇼"란 파동 이후 그와 갈라서면서 레슬링계에선 "김일과 장영철은 이승에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라고까지 단언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 사건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최악의 오점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올 2월 그와 41년 만에 재회했다. 그 재회 덕분에 그는 눈을 감으면서 모멸감으로 점철된 한숨과 고통의 시간으로부터 풀려나 마음이 한결 가벼웠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장영철. 그는 분명 한국 최고의 레슬러 중 한 명이었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국내 프로레슬링을 이끈 주역이다. 일본에서 스승 역도산이 프로레슬링의 창시자였다면, 한국에선 장영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그와 한 차례 맞붙었던 적이 있었다. 65년 8월 일본의 모리와 대결에서 승리하며 초대 극동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후 그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나를 꺾어 국내파 최고 지존의 명성을 이어 가고 싶어 했지만 승부의 세계는 뜻대로 되지 않고 냉혹할 뿐이다. 나와 맞붙은 경기에서 그는 국제 경기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지고 말았다.

난 경기가 끝난 후 그를 만나 "일본에 가서 레슬링 기술을 좀 더 다듬으면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해라"라고 권유했다. 장영철의 기술 그리고 스피드라면 일본에서도 통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서 선진 레슬링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아가 상당히 불쾌해 했다.
 
그는 일본 프로레슬링과 한국 프로레슬링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별거 아니다"란 말을 수차례 했었다. 사실 두 나라의 프로레슬링 차이는 별로 없었지만 링 위에선 엄연히 실력 차이가 존재했다.
 
그가 일본행을 거부할 즈음인 65년 11월 25일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 일정이 잡혔다. 그는 이 경기에서 일본 선수와 맞붙기로 돼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본 선수의 코를 납작하게 하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난 걱정이 앞섰다. 그가 일본 선수를 너무 얕잡아 보지 않느냐는 우려 탓이다.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훈련해야만 했는데 장영철은 훈련마저 게을리했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그의 상대는 오쿠마로 일본에서 중·상급 수준의 선수였다. 그는 오쿠마를 박살 내겠다는 심정으로 링에 올랐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강점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일본 선수를 반드시 꺾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 속에서 링에 오른 그는 처음에는 공격을 압도했다.
 
그러나 경기가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오쿠마가 1-1 상황에서 코너에 몰린 장영철에게 새우꺾기 공격을 시도했다. 허리를 꺾인 그는 고통을 못 이겨 매트를 손바닥으로 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가 항복하지 않자 오쿠마는 계속 공격을 가했다. 링 사이드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후배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자 일제히 경기장에 난입했다. 그들은 오쿠마의 머리를 병과 의자로 내리치며 난투극을 벌였다. 이 소동으로 경기는 중단됐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논쟁으로 비화됐다. 쇼 파동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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