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도 뛰는 프로리그 ‘애국가’ 필요한가
일간스포츠

입력 2006.10.13 20:21

“구시대적 의례” 팬들 대부분 폐지 주장
국가 대항전선 ‘애국심 고취’ 긍정 효과



아시안컵(아시아선수권) 축구 예선 시리아전이 열린 지난 1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붉은 악마 응원단의 대형 태극기 물결을 바라보며 애국가를 듣는 관중은 선수들에 대한 믿음과 승리에 대한 기대로 한껏 고양돼 있었다. 선수들도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같은 날 2006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한화-기아 3차전이 열린 대전구장. 경기 전 어김없이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의식 따로 관중 따로였다. 옆 사람과 잡담하거나. 음식을 먹고. 또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사람이 상당수였다.

최근 각종 프로 경기에 앞서 거행되는 애국가 의식에 ‘태클’이 걸렸다. 애국가 의식이 경기장 분위기를 무겁게 한다는 관중의 불만이 제기되면서 찬·반 도마 위에 올랐다.

“국민 의무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라는 의견에 맞서 “분위기를 떨어뜨리고. 의례를 지키는 사람도 없는데 아예 없애는 게 낫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스포츠에서 애국가 연주는 반드시 필요한가. 아니면 시대착오적 의례인가.



●대학원생: 열띤 토론 끝에 폐지

지난 10일 건국대학교 체육교육대학원 스포츠경영학 전공 수업에서는 이색 주제를 놓고 토론에 불이 붙었다. 이 대학 스포츠경영학부 최청락 교수가 대학원생들에게 “경기 전 애국가 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데서 비롯됐다.

처음엔 대다수가 “애국가 의식은 당연하다”라며 수십 년 동안 길들여진 관행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론이 거듭될수록 상당수 학생들이 국내 프로리그 경기 전 애국가 연주에 대해서 폐지 쪽으로 돌아섰다.

앞서 이 대학 체육학부 학생 240명을 상대로 한 찬·반 조사에선 60명만이 애국가 연주에 대해 반대했고. 180명은 찬성 의사를 나타냈다고 한다.

대학원생과 학부생 사이 이같은 차이에 대해 최 교수는 “토론 없이 그냥 찬반 조사를 했을 때는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이 비슷한 비율을 보였다. 그러나 토론으로 이어지면 폐지론으로 돌아설 확률이 높다”라고 밝혔다.





●프로야구: “요식 행위에 불과”

팬들의 반응은 어떤가. 한 야구 마니아가 포털 인터넷 야구 토론방에 “야구 경기 전 애국가 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결론은 대부분 폐지. “국가간 경기면 모르는데 왜 야구장에서 애국가를 트는가”(라니조아).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팬들 처지에선 요식 행위에 불과”(핑크). “용병들은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뻘쭘하다”라며 폐지론을 주장한다.

마재선 한국체육과학연구소 스포츠 정책개발 연구원은 “이승엽이 기미가요를 듣고 경기를 한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라면서 애국가 의식 폐지론에 한 표를 던졌다.

반면 “애국가가 나오면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는다”(류노식혜). “관객들에게 ‘이제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알리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찬란)라는 찬성 쪽 의견도 있었다.



●프로축구: 클럽송이 대세

프로축구는 ‘클럽송’이 대신하는 추세다.
제주 유나이티드는 연고 이전 전인 부천 SK 시절부터 애국가 연주를 없앴다. FC서울은 올해 후기리그 들어 애국가 의식을 생략했다. FC서울 관계자는 “클럽 간 경기에서 굳이 애국가가 나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올초부터 애국가 연주를 없애려 했지만 너무 갑자기 없애 버려도 팬들이 혼란스러워 할 듯해서 여유를 두고 시행했다”라고 설명했다.

현대 울산도 같은 생각이다. 울산 관계자는 “경기 전 신나는 음악으로 분위기가 고조됐는데 애국가가 나오면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프로 구단 한 관계자는 “경기 전 애국가 연주는 강제 조항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라고 말했다.



●프로농구·배구: “국민적 합의 필요”

프로농구·프로배구도 애국가와 함께 경기를 시작한다. 한 농구인은 “국내 리그 경기에서 애국가 연주를 하는 것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 볼 때”라면서 “농구는 다른 스포츠 종목보다 용병 비율이 높은 편인데 애국가를 틀면 분위기가 가라앉는 느낌이다”라고 밝혔다.

한국농구연맹(KBL) 관계자는 “신중하게 고려해 보겠다”는 반응이다. 한국프로배구연맹(KOVO) 관계자는 “애국가 폐지에 대한 팬들의 공감대와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면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최종필 남서울대학교 스포츠산업학부 교수는 “경기 전 애국가 연주는 스포츠를 통한 내셔널리즘을 강요하는 측면도 있다. 국가 간 경기는 몰라도 국내 프로리그에서 애국가 연주는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외국에선

미국에선 국가가 경기 시작을 알린다. 프로농구(NBA)·프로야구(MLB)·미식축구(NFL) 등 주요 프로 스포츠 경기 때 국가 연주를 한다. 이 의식이 뿌리를 내린 것은 프로야구에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도중 열렸던 시카고 커브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월드 시리즈 때 관중석의 밴드가 느닷없이 미국 국가를 연주했다. 당시 미국의 참전으로 애국심 열기가 한창 고조되던 상황에서 이 연주는 큰 호응을 얻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면서 경기 전 국가를 부르는 것이 일반화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국가를 부르는 영광을 어떤 가수가 차지하는지에 관심이 집중되곤 한다.

그러나 유럽 축구 프로리그 경기에서 국가를 틀지 않는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등에서도 식전 행사로 국가를 연주하지 않는다. 프로팀 경기 때는 단지 해당 팀의 클럽가를 연주한 뒤 선수들끼리 악수하는 것으로 의식을 끝낸다.

브라질에서는 국내 프로리그 개막전 때만 국가를 연주한다. 일본 국내 프로리그도 마찬가지다.



●애국가 영리 목적이면 저작권 내야

저작권법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어디서건 국가를 부를 수 있다”(저작권법 제26조)라고 되어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공연이란 청중이나 관중으로부터 돈이나 대가를 받지 아니하고. 공연자(가수·연주자)에게도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에서 국가를 부르는 것이다. 경기장 관중석에 앉아 국가를 따라 부르는 것도 허용된다.

그러나 프로구단과 협회는 관중으로부터 돈을 받고 영리를 추구하여 경기를 운영한다. 가수가 등장해 국가를 부를 때 가수에게 보수도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는 제26조의 비영리 공연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

다만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주체는 프로구단이나 협회이지 관중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 저작권은 유족에 있다. 그러나 유족들은 저작권을 대한민국 정부로 넘겼다. 도움말=이재만 변호사

정병철 기자 [jbc@il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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