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은 지금 걷기 열풍 “잘 걷는 것이 행복의 첫 걸음마죠”
일간스포츠

입력 2007.05.13 17:15

각종 관련 대회·서적·여행 등 쏟아져

"나에게 새 삶을 준 ‘생명 길’입니다. 자동차 매연이나 지하도 악취쯤은 문제가 아니죠."

10여 년째 IT 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황동열(41)씨. 그는 매일같이 오전 7시면 어김없이 청바지. 흰 면티. 푸른색 운동화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서울 봉천동에서 여의도 사무실에 이르는 10㎞가량을 걸어서 출근하기 위해서다. 황씨는 업무 특성상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기가 일쑤였다.



점심을 먹고도 이내 사무실에 들어올 때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지난해 11월엔 체중과다로 인한 고혈압 증세를 보였다. 황씨는 고민 끝에 걷기를 통한 다이어트에 나섰다. 석 달 만에 101㎏에 이르던 몸무게는 70㎏으로 줄었다.

허리 치수도 10인치 이상 줄어 바지 12벌을 새로 마련했다. 그는 "걷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아 13년 간 몰던 차도 팔았다. ‘40대 돌연사’와 관련된 기사가 나올 때마다 걱정하던 가족도 ‘사람이 달라졌다’며 반기고 있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걷기 열풍’이 거세지고 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십만 명의 걷기 애호가들이 한강 둔치. 남산 순환로 등 집 주변의 걷기 명소를 찾아 나서고 있다. 올 한 해만 전국 각지에서 300여 개의 걷기 대회가 열린다. 서?×?매달 수십 권의 관련 서적이 쏟아지고 있다. 걷기 운동과 문화 답사를 결합한 ‘도보 여행’은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스포츠·의학 교수 1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 한국걷기과학회에 따르면 운동을 목적으로 매주 3회 이상. 30분 넘게 걷는 성인은 20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강옥 회장(상지대 교수·대한걷기연맹 이사장)은 "걷기의 효능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때는 2000년 전후"라며 "이처럼 짧은 시간에 큰 인기를 얻은 현상은 외국서도 찾기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1만여 명 넘는 초대형 동호회 등장

걷기 열풍을 타고 관련 동호회도 크게 늘었다. 다음·네이버 등 대형 포털에서 ‘걷기’ ‘도보 여행’ 등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모임은 500여 개에 이른다. 1만 명을 넘는 초대형 동호회부터 10여 명의 소모임까지 다양하다.

235개 시·군·구 보건소들은 2005년부터 지역 주민의 걷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성기홍 한국워킹협회 부회장(스포츠의학 박사)은 "4~5년 전만 해도 마라톤·등산에 밀려 걷기는 운동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요즘엔 전국 수천 개의 동호회가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창립 1년 만에 1700여 명의 회원이 가입한 ‘네이버 걷기클럽’엔 요즘도 하루 평균 20여 명의 신입 회원이 찾아온다. 신필상(43) 회장은 "실직의 아픔을 달래려고 혼자 시작한 동호회가 이렇게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걷기에 대한 지식도 얻고 동행자를 찾으려는 회원들의 욕구가 강한 것 같다"라고 밝혔다.

회원들은 "동호회에 가입한 뒤 규칙적으로 더 오래 걸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 같다"라고 말한다. 초보자에게 특히 장시간 걷기에서 오는 외로움과 지루함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당뇨를 앓던 중 의사 권유로 걷기를 시작한 정광진(60)씨는 올 2월 동호회에 가입했다. 3개월 동안 정씨는 하루 20㎞씩. 모두 1500㎞ 이상을 걸었다고 한다. 그는 "혼자 걸을 땐 하루 5㎞도 넘기기 어려웠다. 힘들어 그만 걸을까 해도 묵묵히 걷는 다른 회원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동호회는 초보자에게 바른 자세와 다양한 코스를 가르치는 교습소 구실도 한다. 다양한 길동무를 사귈 수 있는 것도 동호회의 장점이다. 마라톤 등 격렬한 운동과 달리 걷기는 동행자와 자연스런 대화가 가능하다.



■도보 여행. 맨발 걷기로 확장

최근 걷기 동호회 사이에선 자연 경관이 수려한 곳이나 문화 유적지를 찾아가 걷기를 즐기는 ‘걷기 여행’ 행사가 활발하다. 포털 다음의 걷기 모임 ‘세상걷기’는 13일 회원 40여 명이 함께 문경새재 옛길 10㎞를 따라 걸었다.

주제는 문경새재에 얽힌 역사와 전설이다. 이 모임은 올해 섬진강·수원 화성·파주 헤이리 등을 방문하는 행사도 가졌다. 대표 황규석(38)씨는 "걷기는 체력 단련 차원을 넘어 지역 문화와 역사를 체험하는 좋은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요즘엔 황학동 골목 등 오래된 거리를 찾는 ‘골목길 걷기’. 성벽을 따라 4대문을 도는 ‘성벽 따라 걷기’ 등 테마 걷기도 유행이다. 경북 경주에선 시민단체 주도로 보름 무렵 야간에 경주 남산 등 유적지를 돌아보는 ‘달빛 기행’이. 진주에선 남강과 진양호를 따라 걷는 행사가 인기다.

해외 도보 여행에 나서는 이도 늘고 있다. ‘나를 찾아 길 떠나는 도보여행’ 회원 8명은 지난달 80일 일정으로 중국 베이징을 출발. 서울을 거쳐 일본 도쿄까지 2500㎞ 대장정에 나섰다. 1999년부터 걷기 운동을 해 온 회장 박용원(57)씨는 "차를 타고 하는 여행보다 걸을 때 10배 이상 구경할 게 많다. 정신과 육체에 모두 좋은 경험"이라고 말했다.

맨발 걷기 등 이색 활동도 늘고 있다. ‘족(足)모임’ 회원 80여 명은 매주 대전 계족산의 숲길 13㎞가량을 맨발로 걷는다. 회원 신상래(42)씨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촉촉한 흙을 밟으면 몸 속 모든 장기가 자극을 받는다. 맨발 걷기 뒤 3개월 만에 ‘수년간 앓아 온 불면증이 나았다’고 하는 회원도 있다"라고 전했다.

‘울트라 도보’는 걷기 애호가라면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대회다. 12.5시간 이내 50㎞. 25시간 이내 100㎞를 걷는 강행군이다. ‘인생길 따라 도보 여행’의 김재규(48) 대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는 만큼 완주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천인성ㆍ이현구 기자 [guch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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