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문다. 연말이면 누구나 지난 1년을 되돌아보고 과거에 대한 회상에 젖어 들게 마련.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살이에 지친 현대인들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난 날의 풍경을 떠올리며 힘겨운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의 향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라지는 것들’ 속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아늑한 골목으로 접어들면 30촉 전구처럼 따스한 추억이 삶에 지친 어른들을 반긴다. 지난 8월 문을 연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20세기 소년소녀관’은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21세기를 추억으로 비추는 20세기 한국 장난감 박물관이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앉은뱅이 책상이 달린 소년의 방. 구석에 로봇이 그려진 신발주머니가 놓여 있고 빼꼼히 열린 책상 서랍엔 플라스틱 비행기 모형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소년은 어디 갔을까? 이윽고 골목길에 접어들면 비로소 소년이 달려갔을 만한 곳을 짐작하게 된다. 소년·소녀들이 즐겨 찾던 9개의 가게를 재구성한 전시관이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다. 가게마다 장난감 종류에 따른 고유의 테마가 있다.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뽀빠이 문구·완구’에는 70·80년대 아이들이 얼마 안되는 용돈으로도 사서 가지고 놀 수 있었던 장난감이 가득하다.
20세기 소년소녀관의 현태준(41) 관장은 “1970년대 중반 아이들이 가장 많이 갖고 놀던 10원·100원짜리 장난감들이 이곳에 전시돼 있다”고 설명했다. 과연 이곳에는 단돈 10원이면 살 수 있었던 플라스틱 총과 구슬, 종이인형 등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촘촘히 늘어서 있다.
길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이번엔 그 당시만 해도 고급이었던 장난감이 쇼윈도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로케트 과학사’에는 가지고 놀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과학교재’로 둔갑한 조립식 장난감이 있다.
물론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은 “맨날 장난감만 가지고 놀고 공부는 안 한다”는 부모님의 꾸지람을 막기 위한 것. 이름도 거창한 ‘오로라 완구’에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갖고 놀았을 법한 값비싼 장난감이 눈에 띈다.
건전지를 넣으면 움직이는 놀잇감들이 아이들을 유혹한다. 아마 아이들은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두 손을 꼭 모은 채 쇼윈도 앞에서 넋을 놓고 서 있었으리라.
그 밖에도 한국산 미미 인형이 가득한 ‘무지개 극장’, 아기자기한 팬시류와 그때 그 시절 왕자파스까지 간직된 ‘캔디 문방구’ 등 곳곳에 가득한 볼거리가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전시관 구석에서 뿅뿅거리는 기계음을 울려대는 너구리 게임기도 정겹고, ‘도레미 레코드’에서 가수 정수라의 앳된 사진을 볼 수 있는 것 역시 덤이다. 은은히 흘러나오는 이선희의 ‘제이에게’ 선율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걱정 없던 유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장난감은 총 5000점 정도다. 98년부터 이 많은 장난감을 모두 혼자 모았다는 현 관장은 “장난감을 구하려고 제주도까지 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평일에도 아침 일찍부터 나와 쇼윈도 유리를 열심히 닦는 그의 모습은 진정 옛 시절 동네 문방구 아저씨의 판박이다. 현 관장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인 유년 시절을 기억할 수 없다면 안타까운 일”이라며 “10원짜리 장난감일지언정 그게 남아 사람들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추억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철없는 ‘키덜트(키드와 어덜트의 합성어)’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세상은 동심을 간직한 어른들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 아름답던 동심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진다면 한번 찾아가 보자. 자세한 관람 정보는 홈페이지(www.ilikedalki.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의전화 031-949-9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