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성 짙은 투자자들이 대부분이었던 2017년에 이어 2018년은 ‘묻지 마식 투자’가 점점 사라지고 일반 투자자들 및 업계가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암호화폐 시세는 급락이 계속되며 지난 1월 고점 대비 90% 이상 하락한 암호화폐가 속출했고, 투자자뿐 아니라 암호화폐로 투자받은 기업들까지 곡소리를 내고 있다.
뚜렷한 출구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업계의 목소리다. ‘규제 공백’ 1년여 기간에도 명확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정부와 해외 암호화폐 거래소들의 한국 상륙도 걱정스럽기만 하다.
무너지는 암호화폐 시장… 필요한 정부의 역할은
국내 암호화폐 거래 업계에 따르면 주요 암호화폐 가운데 20여 종이 올해에만 90%가량 하락했다.
대장주 격인 비트코인은 이달 들어 700만원대에서 300만원 가까이 빠진 400만원대로 떨어졌다. 개당 200만원까지 거래액이 치솟았던 이더리움도 현재 10만원으로 꼬꾸라졌다. 고점 대비 20분의 1 수준이다. 만약 1월 초에 1억원 규모의 이더리움을 구매했다면 현재 500만원만 남아 있는 셈이다.
대표적으로 퀀텀은 1월 초만 해도 개당 12만원에 거래됐지만 현재 개당 1800원에 거래된다. 고점 대비 70분의1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황이다.
‘짝퉁’ ‘사기’ 등 부정적 이미지로 낙인찍힌 암호화폐 거래소도 시장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퓨어빗 거래소다. 퓨어빗은 지난달 고객들에게 투자금 1만6000이더(ETH), 현재 시세로 약 16억8000만원을 모은 뒤 사이트를 폐쇄, 잠적해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최소한의 거래소 등록 요건이 필요한 이유다. 현재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는 어느새 세 자릿수까지 늘어난 것으로 추산되지만, 이 가운데 실질적으로 거래가 이뤄지는 거래소는 절반 수준이라는 것이 업계의 관측이다.
암호화폐의 폭락와 국내 거래소들의 혼탁함 속에서도 정부는 암호화폐와 관련된 뚜렷한 규제나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답답함이 쌓이고 있다.
우리나라에 비해 다른 주요 국가들의 암호화폐 관련 규제는 명확하다.
미국 재무부 금융범죄단속반은 가이드라인을 통해 암호화폐 거래소를 자금서비스업에 등록하고 고객파악제도(KYC), 자금세탁방지(AML) 프로그램 설치, 의심거래행위 보고를 권고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가 암호화폐 거래소와 계약을 맺은 은행에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부과하는 것과 대조되는 제도다.
일본 역시 암호화폐 거래소 등록제를 실시해 거래소에 자본 요건, 이용자 보호 시스템, 보안 시스템 등 구체적 요건을 제시하고 이를 충족한 거래소만 서비스를 운영할 수 있게 한다.
또 일본 금융청은 지난 10월 일본 암호화폐거래소협회(JVCEA)에 거래소에 대한 관리 및 감독 권한을 부여, 규제를 어기는 거래소를 제재할 수 있는 권한까지 협회가 갖도록 했다.
싱가포르 통화청은 일찌감치 지난 2014년 3월, 거래소 규제 계획을 발표해 거래소가 거래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수상한 거래가 감지될 시 당국에 신고하도록 규정했다.
암호화폐 거래소만은 엄격히 관리하겠다던 우리 정부는 법적 인정이나 제도권화에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국내 거래소 수조차 공식 집계하지 않는 실정이다.
윤종수 정보기술(IT) 관련 법률 변호사는 “현재 문제점은 정부 정책의 방향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라며 “상향식으로 자율규제 정책을 적극 수용하고 정책 공백을 피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형태의 비법규적 규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방 시장 공략하는 중국, 해외로 눈 돌리는 한국
국내 거래소들이 안방 시장에서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글로벌 암호화폐 거래소 순위 1~3위를 독식한 중국계 거래소들이 한국에 상륙하는 상황이다. 바이낸스와 오케이이엑스, 후오비가 그것이다.
오케이엑스는 ‘오케이코인’ 정식 서비스를 곧 시작하고, 후오비는 원화마켓을 열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바이낸스 역시 한국 직원을 채용하며 한국시장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한국이 인구 대비 암호화폐를 보유, 거래하는 이용자가 많다는 것이 유효했다"며 “암호화폐 생태계에서 원화 결제 시장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속수무책인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빅3 사는 불확실한 규제에 따른 국내 암호화폐 거래 환경의 악화로 오히려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분위기다. 빗썸, 업비트, 코인원이 동시에 해외 공략에 나서며 글로벌 시장 경쟁에서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은 코인원으로 지난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서비스를 오픈했고, 이어 빗썸과 업비트가 각각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시작을 알렸다.
당시 이석우 두나무 대표는 지난 9월 싱가포르 진출 계획을 밝히며 “국내 거래 환경이 좋아지기만 기다리다가는 글로벌시장에서 뒤처질 것 같아 해외 진출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코인원은 지난달 29일 몰타에 암호화폐 거래소인 씨젝스를 열었고, 사흘 뒤인 이달 1일에는 빗썸이 핀테크 기업인 시리즈원과 계약을 맺어 미국에 증권형 토큰 거래소를 설립할 계획임을 공개했다. 지난 5일 업비트 역시 코인원이 먼저 선점한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태국 등 동남아 지역에 거래소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는 등 꾸준히 글로벌시장에 대한 관심을 이어 가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업계의 목소리다. 우선 해외시장 공략을 위한 해외 송금이 어렵다. 자금 세탁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다.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는 해외 법인을 세우기 위해 송금하려고 했지만 송금이 원활하지 않아 해외 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
게다가 지난 1월부터 암호화폐 실명제가 시행되면서 시중은행들은 자금 세탁 등 우려를 표하며 거래소에 신규 실명확인계좌를 발급해 주지 않는 점도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