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진지하고 모범적인 키움 박병호(33)가 뜻밖의 원대한(?) 포부를 밝히자 많은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박병호는 여전히 차분하고 담담했다. 야구에 대한 그의 진심이 담긴 코멘트였기 때문이다.
박병호는 은퇴한 이승엽의 뒤를 잇는 KBO 리그의 대표적 홈런 타자다. 국가대표 4번 타자 자리를 물려 받았고, 홈런에 관련된 여러 기록에서도 이승엽 다음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올해 역시 144경기 중에 22경기를 뛰지 못하고도 홈런 33개를 터트려 개인 다섯 번째 홈런왕에 올랐다. 대부분의 거포들이 반발력을 낮춘 공인구 영향으로 고전했지만, 박병호의 폭발력만은 여전했다.
그래도 그는 늘 그렇듯 "기록이나 홈런왕 타이틀 생각은 안하면서 야구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대신 그의 바람은 '부상 없이 꾸준하게 경기에 나가는 것'이다. 매일 그라운드를 달리고 타석에 들어서고 1루 옆을 지키는 게 그에게는 삶의 활력이자 이유여서다. '50세까지 야구하고 싶다'는 바람 안에는 최대한 오래, 힘이 닿는 데까지 현역 생활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묻어 있다.
물론 박병호 정도 타자가 쉬지 않고 경기에 나가면 누적 기록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돼 있다. 다만 지난해와 올해 모두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한 달 가까이 결장해야 했던 게 마음 속 짐으로 남았다. 박병호는 "매년 전 경기를 목표로 뛰고 있는데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할 때가 생겨 올해도 힘들었다"며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고, 끝까지 응원해주셨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갔지만, 4패를 당하고 물러난 것도 잊을 수 없는 아쉬움이다. 그는 "올해 고척스카이돔(키움의 홈)에서 두산의 우승 세리머니를 지켜본 것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며 "내년에는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그런 박병호는 팀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롤 모델이다. 키움의 주전 유격수에서 이제는 국가대표 주전 유격수로 성장한 팀 후배 김하성(24)이 딱 그렇다. 입단 이후 매년 조금씩 기량을 키워 온 김하성은 "올해 내가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을 때 박병호 선배님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고 많이 힘을 주셔서 정말 감사했다"고 했다.
김하성은 '홈런 치고 도루하는 유격수'다. 테이블세터와 중심타선 가운데 어느 자리에 배치해도 제 몫을 해낸다. 갈수록 좋아지는 수비 능력도 일품이다. 박병호의 뒤를 잇는 키움 간판 타자로 성장하고 있다. KBO 리그 최고 유격수 자리에 올라섰으니, 이제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볼 때다.
5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낸 그는 "은퇴 전에 홈런왕에 한번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당장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불려 홈런 타자로 변신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충분한 장타 잠재력을 확인했으니, 그 재능을 앞으로 계속 끌어 올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김하성의 성장은 곧 한국 국가대표팀의 전력 향상을 의미한다.
다만 그 꿈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팀 선배이자 롤모델 가운데 한 명인 박병호에게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게 문제다. 이 때문에 김하성은 "박병호 선배가 은퇴하시기 전까지는 계속 홈런왕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굳이 좋아하는 선배를 뛰어 넘으면서까지 정상에 서고 싶지는 않다는 의미다.
'박병호가 정말 50세까지 선수 생활을 한다'는 무시무시한 전제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나와 박병호 선배는 나이 차(9세)가 많이 나기 때문에 내가 마흔 넷 정도까지 잘 버티면 선배가 이미 은퇴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며 "선배님이 50세까지 계속 홈런왕을 받으시고, 그 뒤를 내가 한 번 이어보겠다"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앞에서 끌어주는 선배와 뒤에서 열심히 따라가는 후배. 키움 선수단이 구단 안팎의 이런저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해 나가는 비결이다. 박병호와 김하성은 그 원동력을 팬에게서 찾았다. 박병호는 "우리 키움 팬분들은 다른 팀에 비해 수가 많지 않아 한 분이 일당백으로 응원해주시는 것을 알고 있다"며 "선수들이 너무 잘 알고 감사하고 있다. 홈 경기에 만원 관중이 차는 그날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김하성 역시 "내년에는 꼭 우승으로 정상에 서서 열심히 응원해주신 팬들 기대에 보답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