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의 산에서 내려온 샤라포바
일간스포츠

입력 2020.03.02 06:00

김희선 기자
높고 높은 산이었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계곡과 굴곡들로 가득차 있었지만, 정상에 서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산. '러시안 뷰티' 마리야 샤라포바(33)가 올랐던 그 높은 산의 이름은 테니스였다.
 
여자 프로테니스(WTA)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샤라포바가 코트를 떠난다. 샤라포바는 26일(현지시간) 잡지 '보그와 베니티페어'를 통해 "테니스에 작별 인사를 보낸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샤라포바는 이 잡지에 실은 기고문을 통해 "돌이켜 보면 내게 테니스는 산과 같았다. 계곡과 굴곡들로 가득차 있었지만 정상에서 바라본 경치는 놀라웠다"고 자신이 코트에서 보낸 시간을 회상하며 "지난 28년 동안 다섯 개의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얻었고, 이제 나는 또다른 산에 올라 다른 지형에서 경쟁할 준비가 됐다"고 은퇴 소감을 전했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유명하며 또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번 여자 선수인 샤라포바가 테니스 라켓을 내려놓기로 결심한 이유다.
 
샤라포바는 다른 선수들이 그렇듯이,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라켓과 함께 보냈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겪은 샤라포바의 부모는 1987년 러시아 시베리아의 냐간에서 그를 낳고 다시 소치로 이주했고 네 살 때 라켓을 선물 받은 소녀는 일찍부터 테니스를 시작했다. 샤라포바의 재능을 알아본 '철의 여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64·체코)가 그의 아버지에게 미국행을 권유한 것이 1993년.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이듬해인 1994년 그의 아버지는 샤라포바를 데리고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했고,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테니스를 시작했다. 
 
샤라포바의 메이저 5회 우승 장면. 2004년 윔블던(왼쪽부터)·2006년 US오픈·2008년 호주오픈·2012년과 2014년 프랑스오픈.

샤라포바의 메이저 5회 우승 장면. 2004년 윔블던(왼쪽부터)·2006년 US오픈·2008년 호주오픈·2012년과 2014년 프랑스오픈.

 
결과적으로 샤라포바 가족의 선택은 옳았다. 샤라포바는 프로 전향 후 2004년 윔블던 여자 단식 결승에서 겨우 17세의 나이로 '흑진주' 세리나 윌리엄스(39·미국)를 꺾고 화려하게 세계 테니스 무대에 등장했다. 미모와 실력을 갖춘 샤라포바의 등장에 세계는 열광했고, 샤라포바는 모두의 환호에 부응하듯 2005년 세계 랭킹 1위에 올랐고 2006년 US오픈과 2008년 호주오픈, 2012년과 2014년 프랑스오픈을 제패하며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이처럼 화려한 성적과 스타성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떠오른 샤라포바는 어느새 테니스를 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정도의 글로벌 브랜드 그 자체인 선수가 됐다. 그야말로 샤라포바의 시대였다.
 
테니스 외적으로도 샤라포바가 거둔 성공은 대단했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여자 스포츠 선수 수입 순위에서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1년 연속 1위를 기록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사탕 업체인 '슈가포바'를 만들어 인지도와 수입을 동시에 끌어올리기도 했다. 포브스는 "샤라포바가 대회 출전 상금과 초청료, 후원 계약 등을 통해 벌어들인 총수입은 3억2500만 달러(약 3950억 원)에 이른다"며 "이는 3억5000만 달러의 윌리엄스에 이어 여자 선수로는 전 종목을 통틀어 2위에 해당하는 액수"라고 밝혔다. 11세 때부터 계약을 맺은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를 비롯해 태그호이어, 에비앙과 같은 브랜드와도 꾸준히 계약을 이어오며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글로벌 브랜드로 만들어나갔다. 이 중 오랜 계약 관계를 이어온 나이키는 샤라포바의 은퇴를 맞아 헌정 광고를 제작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표현대로, 샤라포바의 테니스 인생에 굴곡이 없었던 건 아니다. 샤라포바는 2016년 1월 호주오픈 도핑테스트에서 약물 양성 반응이 나와 국제테니스연맹(ITF)으로부터 15개월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다. 당시 샤라포바는 마그네슘 결핍과 불규칙한 심작 박동 등 심장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2006년부터 멜도니움을 복용해왔으며,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이 약물을 해당 년도부터 금지 약물로 지정한 것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결국 국제스포츠재판소(CAS)를 거쳐 징계를 15개월로 줄였지만 2017년 상반기 복귀한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15개월의 징계 기간, 그리고 수 차례 겹친 부상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르는 것은 샤라포바에겐 지나치게 높은 '산'이었다. 징계에서 복귀한 뒤 샤라포바가 메이저 대회에서 거둔 최고 성적은 2018년 프랑스오픈 8강. 지난 세 차례 그랜드슬램 대회에서는 모두 1회전 탈락했고, 특히 지난해 US오픈에서 '숙적' 윌리엄스에게 완패하며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 결국 샤라포바는 올해 1월 열린 호주오픈 1회전 돈나 베치치와 경기에서 0-2로 패한 경기를 마지막으로 코트에 작별을 고했다. 이제 테니스의 산에서 내려온 샤라포바는, 또다른 산에 오르기 위해 은퇴 경기 없이 코트를 떠날 계획이다.
 
김희선 기자 kim.he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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