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엔드게임] 어른의 욕망, 소년의 성장
일간스포츠

입력 2020.07.15 06:00

김식 기자

김응용 KBSA 회장의 '투구수 제한' 효과

사진=중앙포토

사진=중앙포토

 
# 야구 해설위원 대니얼 김은 지난 2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괴물 투수를 만났다. 스프링캠프에서 괴력을 뽐낸 네이트 피어슨(24·토론토 블루제이스)이다. 시속 160㎞ 이상의 강속구를 던지는 그를 보며 대니얼 김은 “당장 메이저리그에 가도 20승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토론토 구단 관계자는 “피어슨은 올해 마이너리그에서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토는 최고 유망주인 피어슨이 신체적·기술적으로 충분히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년 이후에 류현진(33·토론토)과 원투펀치를 이뤄주길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 구단은 과학적인 관리 시스템을 실행 중이다.
 
# 사사키 로키(19·지바 롯데 마린스)는 2020년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 투수다. 고교 시절 시속 160㎞ 이상의 패스트볼을 뿜어내 '제2의 오타니 쇼헤이(26·LA 에인절스)'로 불렸다.
 
그가 유명해진 건 강속구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고시엔(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예선전 마지막 경기에 등판하지 않아서 더 화제가 됐다.
 
사사키는 예선 4라운드 경기에서 12이닝 194구를 던졌고, 4강전에서 9이닝 130구를 던지며 완봉승을 거뒀다. 그러나 결승전에 등판하지 않았다. 35년 만에 여름 고시엔 본선 진출을 꿈꿨던 오후나토고는 2-12로 대패했다. 고쿠보 요헤이 감독은 “사사키가 (무리하다가) 깨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세계 야구는 젊은 투수들의 투구수 관리를 놓고 몇 년째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2010년대 들어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미국야구협회가 공동으로 학생 선수들의 투구수 관리 프로그램 ‘피치 스마트(Pitch Smart)’를 개발했다. 30개 이하의 공을 던진 투수만 다음날 투구가 가능하고, 81~105개를 던진 투수는 최소 나흘을 쉬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소년 시절부터 잘 관리된 투수는 메이저리그 팀에 입단한 뒤에도 구단별 육성 프로그램에 따른다. 투수의 근력, 유연성, 골밀도 등을 고려해 빅리그 데뷔 시점과 적정 이닝을 정한다.
 
일본도 유소년의 투구수를 제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처럼 완벽히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고시엔 대회의 특수성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3000개 이상의 고교팀이 고시엔 대회에서 경쟁한다. 이 중 대학에 진학하거나 프로에 입단하는 선수는 극히 일부다. 대부분의 선수들에게는 고시엔 대회 자체가 꿈이며 최종 목표이다. 사사키가 지역 예선 결승전에 등판하지 않는 건 일본인의 정서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LG 이민호(왼쪽부터)·KT 소형준·삼성 허윤동. IS포토

LG 이민호(왼쪽부터)·KT 소형준·삼성 허윤동. IS포토

 
한국 야구는 어떤가.
 
진통이 꽤 있었지만, 미국의 ‘피치 스마트’ 모델을 성공적으로 이식했다. 올 시즌 KBO리그에서 이민호(LG), 소형준(KT), 허윤동(삼성) 등 19세 신인 선수들이 선발로 맹활약하는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
 
KBO 리그에는 류현진(33)·김광현(32·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양현종(32·KIA) 이후 대형 투수가 등장하지 않았다. 우수 자원 수급의 문제도 있었지만, 관리의 허점도 컸다. 한 트레이너는 “팔꿈치나 어깨에 부상이 없는 신인 투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고교 시절 팀의 에이스였던 이들이 각종 대회에서 혹사당한 것이다. 고교 에이스들은 프로 입단 후 1~2년은 재활훈련을 하며 보내는 게 관례처럼 됐다. 재활훈련이 끝난 이후에도 고교 시절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어린 투수들의 혹사는 곧 야구의 역사다. 어떤 시대도, 어떤 지도자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유망한 투수의 팔과 우승 트로피를 바꾸는 게 미화됐다. 학생 선수의 건강과 미래는 학교의 명예, 감독의 성과를 위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는 고교 대회에 참가 선수들의 투구수를 2014년부터 제한했다. 처음에는 한계 투구수(130개)를 기록한 투수는 사흘을 쉬어야 한다는, 허울뿐인 규정이 만들어졌다.
 
해태·삼성·한화 감독을 지낸 김응용 KBSA 회장이 2017년 취임한 뒤 투구수 제한 규정이 강화됐다. ▶하루 최다 투구수 105개 ▶투구수 31~45개를 던지면 하루 휴식 ▶46~60개 이틀 휴식 ▶61~75개 사흘 휴식 ▶76개 이상 나흘 휴식을 의무화했다. 한국의 고교 야구의 현실과 거리가 먼, 초강도의 규제였다.
 
현장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선수마다 특성이 다른데 투구수를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건 문제가 있다." "감독 출신인 김응용 회장이 오히려 현장을 무시한다." "투구수를 제한하면 자원이 풍부한 명문고가 더 유리해질 것이다."
 
김응용 회장은 "선수들의 미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현장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 투구수 제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제적으로 강력한 정책을 발표한 KBSA는 2019년 투구수 제한 규정을 조금 완화했다. 하루 최다 투구수 105개 제한을 유지한 채 ▶46~60개 하루 휴식 ▶61~75개 이틀 휴식 ▶76~90개 사흘 휴식 ▶ 91개 이상 나흘 휴식을 명문화했다. 올해 신인 3총사는 고교 3학년 때 이 규정을 적용받았다.
 
학생 선수의 보호·육성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프로 구단과 사령탑의 인식도 바뀌었다. 이민호는 정찬헌과 번갈아 5선발을 맡으며 열흘에 한 번꼴로 등판한다. 소형준은 개막전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됐으나 피로가 쌓이는 시점에 1군 엔트리 제외가 예정돼 있었다. 허윤동은 불펜에서 시작해 선발로 연착륙한 사례다.
 
몇 년 전부터 대두된 '한국 야구 위기론'의 핵심은 경기력 저하였다. 특히 '영건'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였다. 부상에 쓰러진 어린 선수들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거나 찢겼다. 그게 한국야구의 성장판을 닫았다.
 
 
모든 지도자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어린 선수를 극한의 상황으로 내몬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선수의 미래를 걱정하는 고교 감독이라고 해도 교장·학부모의 압력을 받는 게 현실이다. 어른들의 일그러진 욕망의 질주를 제동할 장치가 필요했다. 김응용 KBSA 회장의 투구수 제한 규정은 소년의 성장을 꺾지 않을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었다.
 
김응용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교장실에 우승기 많이 갖다 놓으면 명문학교라고 한다. 아마추어 야구의 목표가 우승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미국 학교에 가 보면, 그 학교 출신 메이저리그 선수들 사진을 걸어놓는다. 학교가 몇 번 우승했느냐보다 그 학교에서 메이저리거가 몇 명 나오느냐가 중요한 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김식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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