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빈(30·두산)이 '가을바람'을 탔다. 스윙이 날카롭고, 발은 가볍다.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두산의 공격 선봉장이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포스트시즌 돌입 전까지 1번 타자를 낙점하지 못했다. 정규시즌 1번 타자로 가장 자주 나섰던 박건우는 가을만 오면 타격감이 떨어졌다. 허경민을 내세우자니, 5·6번 라인의 무게감이 떨어져 보였다. 장타력이 있는 최주환이 부상(오른 발바닥 족저근막염) 탓에 출전 여부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허경민을 1번으로 끌어오기 힘들었다.
그런 김태형 감독의 고민을 정수빈이 덜어줬다. 4일 LG와의 준플레이오프(PO) 2차전에서 1번 타자·중견수로 선발 출장한 정수빈은 4타수 3안타를 기록하며 펄펄 날았다. LG가 스코어 8-5, 3점 차로 추격한 6회 초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는 깔끔한 중전 안타를 생산한 뒤 도루까지 성공, 추가 득점 기회를 열었다. 준PO 성적은 9타석 7타수 4안타. 희생 번트와 희생 플라이도 1개씩 기록했다. 팀 배팅도 좋았다.
이후 정수빈은 1번 타자로 고정됐다. 10일 열린 KT와의 PO 2차전에서도 선발 1번 타자로 나서 3출루·2득점을 기록했다. 단타가 나와도 어렵지 않게 두 베이스를 진루하는 스피드가 돋보였다. 3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는 사구로 출루한 뒤 후속 타자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의 우전 안타 때 3루까지 밟았다. 5회에도 선두타자로 나서 좌전 안타를 치고 나간 뒤 후속 타자 안타 때 두 베이스를 진루했다.
정규시즌에 정수빈은 주로 8·9번 타자로 나섰다. 박건우의 타격감이 좋지 않을 때만 가끔 전진 배치됐다. 8~9월 1번 타자 선발 출전도 6경기뿐이었다. 그러나 순위 경쟁이 절정이었던 10월 3~4주 차는 거의 1번 타자 중책을 맡았고, 포스트시즌도 같은 임무를 이어가고 있다.
2번 타자 페르난데스는 공격적인 성향이다. 발도 느린 편이다. 때문에 두산 1번 타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상대 투수의 공을 많이 끌어내면서, 출루율이 높아야 한다. 베이스에서는 상대 배터리와 내야진을 흔들어야 한다. 현재 정수빈은 이런 요건을 충족하는 타자다.
2015년과 흡사한 행보다. 당시 정수빈은 소속팀이 130경기를 치를 때까지 민병헌(현 롯데)의 뒤를 받치는 2번 타자로 나서다가, 마지막 14경기에서 1번 타자를 맡았다. 한국시리즈 4경기 모두 1번 타자로 나섰고, 타율 0.571·출루율 0.647를 기록하며 두산의 우승을 이끌었다.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도 정수빈이 차지했다.
팀 상황도 2015년과 비슷하다. 두산은 정규시즌을 3위로 마치며 준PO부터 치러야 했지만, 맹렬한 기세로 두 차례나 업셋 시리즈를 만들었다. 2020시즌도 '어게인(Again) 2015'를 노리고 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방망이가 뜨거워지는 정수빈이 그 중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