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석의 리플레이] '편의점 알바' 김유리에게 쏟아진 후배들의 스포트라이트
일간스포츠

입력 2021.02.08 06:01

이형석 기자

선배의 괴롭힘 못 이겨 은퇴, 편의점 알바 시작 / 열흘 새 두 번의 이적, 차상현 감독 "고마운 선수" / "인성이 최고인 선배로 기억되고 싶다"

GS 칼텍스 선수들이 5일 '1강' 흥국생명에 세트 스코어 3-0으로 완승을 거둔 뒤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한국배구연맹 제공

GS 칼텍스 선수들이 5일 '1강' 흥국생명에 세트 스코어 3-0으로 완승을 거둔 뒤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한국배구연맹 제공

 
감독과 선수, 트레이너 등 모든 구단 관계자가 옹기종기 모였다. 다들 인터뷰 중인 한 선수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금껏 어느 프로 스포츠 인터뷰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장면. 몇몇 선수는 '역사적인' 인터뷰 장면을 휴대폰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내 코트에는 눈물이 전염됐다. 동료 선수도, 해설위원도 처음으로 '주연'이 된 그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울지 마"라는 소리가 코트에 퍼졌다.
 
KBSNSPORTS 방송 캡쳐

KBSNSPORTS 방송 캡쳐

 
GS칼텍스가 지난 5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도드람 2020-21 V리그 흥국생명전에서 세트 스코어 3-0으로 승리한 뒤 벌어진 풍경이었다. GS칼텍스 센터 김유리(30)가 지금껏 팀을 위해 해온 희생을 곁에서 지켜봤고, 그의 배구 인생이 힘겨웠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어서다.
 
그는 "취재진과 실내 인터뷰는 단 한 번뿐이었고, TV 수훈 선수 인터뷰는 5일이 처음이었다.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드디어 내가 이 자리에 섰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라고 말했다. 일간스포츠와 인터뷰에서 그는 "제가 뭐라고?"라며 겸손했다. 그러면서도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김유리의 배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2010년 11월, 흥국생명 입단 당시만 하더라도 1라운드 전체 2순위에 뽑힐 만큼 장래가 촉망된 유망주였다. 하지만 한 선배의 괴롭힘이 심했다. 스무 살 소녀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김유리가 코트를 떠나기로 했다. 김유리는 "다른 선배들과는 모두 잘 지냈다. 지금도 그때 (은퇴) 선택에 후회는 없다"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코트를 떠난 뒤 갈 곳이 있었던 건 아니다. '선수 유니폼' 대신 '편의점 조끼'를 착용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는 "은퇴 후에 한 달 정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부모님이 그런 모습을 너무 보기 싫어하셨다. 그래서 '용돈이라도 벌자'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3개월이 지나자,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실업팀에서 연락이 왔다. 그는 대구시청과 양산시청에서 각각 1년간 뛰었다. 김유리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막내는 항상 청소를 잘해야 하지 않나. 그 재능이 아르바이트 때 발휘됐다. 편의점 사장님이 '운동하지 말고, 계속 같이 일했으면 한다'고 권했을 정도"라며 웃었다. 
 
IBK기업은행에서 뛰었던 김유리. 한국배구연맹 제공

IBK기업은행에서 뛰었던 김유리. 한국배구연맹 제공

 
김유리는 2014년 12월 IBK기업은행과 계약해 프로 무대에 돌아왔으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팀을 옮겨 다녔다. 2017년 6월 3일 염혜선의 보상 선수로 현대건설로 이적했고, 불과 11일 뒤 한유미와의 트레이드로 GS칼텍스에 둥지를 틀었다. 프로 네 번째 팀이다.
 
그에게 또 시련이 찾아왔다. 베테랑 한수지의 이적과 신예 권민지의 성장으로 코트에서 설 자리를 점차 잃어갔다. 동시에 팀에서는 베테랑이 돼 있었다.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최근 두 선수가 부상으로 빠지자 김유리의 출전 시간이 늘어났다. 그는 5일 경기에서 자신에게 아픔을 안긴 흥국생명을 상대로 제대로 복수했다. 9점, 공격성공률 64.28%를 기록하며 팀 승리의 선봉장에 섰다. 외국인 선수를 포함해 김연경·이재영·이다영 등 특급 선수들이 모두 나선 경기에서 흥국생명은 이번 시즌 들어 처음으로 셧아웃(0-3) 패배를 당했다. 

 
선배의 괴롭힘에 코트를 떠났던 그는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다. 그가 첫 수훈 선수 인터뷰를 하자 후배들은 마치 그의 팬처럼 주위에 몰려들었다. '주장' 이소영이 그를 인터뷰 장소로 안내했고, 차상현 감독과 동료 선수, 구단 관계자들이 하나둘씩 그의 앞에 모여들었다. 구단 관계자는 "특정 선수가 이끈 것이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라고 전했다.
 
KBSNSPORTS 방송 캡쳐

KBSNSPORTS 방송 캡쳐

 
김유리는 "은퇴 전까지 인터뷰를 못 할 줄 알았는데 (드디어 이뤄져) 기쁘다.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라며 "동료들이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처음부터 울컥했다. 겨우 참았다"라고 회상했다. 한유미 KBS N SPORTS 해설위원은 "그동안 (김)유리의 마음고생을 알고 있어 나도 눈물이 났다"라고 말했다. 차상현 감독은 "인터뷰를 보며 나도 마음이 짠했다. 그동안 다른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 받는 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는데, 묵묵하게 잘 지켜줬다. 고맙다"라고 칭찬했다. 
 
요즘 V리그 웜업존에서 자주 목격되는 열성적인 응원도 그로부터 시작됐다. 동료들을 위해 목청껏 응원을 불어넣는 장면. 대개 베테랑 선수는 이곳에서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지만, 김유리는 후배들과 춤도 추고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그는 "웜업존에서 베테랑이 있으면 후배들은 불편하다. 내가 인상 쓰고 있을 수도 없어 마음을 내려놓고 함께 즐겼는데 재밌더라"고 웃었다. 
 
GS칼텍스가 경기도 가평에 전용 훈련장을 개관한 뒤에는 새벽에 맹훈련하고 있다. 그는 "솔선수범을 고민하다가 좋은 훈련 환경이 갖춰졌으니 새벽 운동을 시작했다. 인생 마인드도 달라졌다"라며 "나도 체중을 많이 감량했다"라고 말했다.
 
개인 욕심은 없다. 그는 "현실 직시가 빠른 편이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다"라면서 "올 시즌 선수들이 너무 많이 다쳤다. 동료 선수들이 더 부상 없이 시즌을 잘 치렀으면 한다"고 했다. GS칼텍스는 '1강'으로 손꼽힌 흥국생명의 유일한 대항마로 손꼽힌다. KOVO컵을 비롯해 이번 시즌 3승 3패로 팽팽하다. 그는 "우리가 전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팀워크는 최고"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후배들과 격의 없이 지낸다. "어떤 선배로 기억되고 싶나"라는 질문에 "'인성이 최고였던 선배'라는 평가를 듣고 싶다. 후배들에게도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라고 말했다. 김유리는 "GS칼텍스에서 나도 어른이 된 것 같았다"라고 한다.
 
이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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