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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동료 때려죽인뒤 불태웠다"···실미도 훈련병의 처참한 죽음

“동료를 때려죽이고, 그 시신을 기름으로 태워 바다에 띄우도록 했다.” 1970년 8월 어느 날 실미도 부대 연병장. 누렇게 색이 바랜 흙투성이 군복 차림의 윤태산 공작원이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끌려 나왔다. 땡볕의 연병장에 무릎이 꿇린 그의 군복은 땀으로 얼룩졌고 이미 퉁퉁 부어 피범벅인 얼굴은 분간조차 어려웠다. 연병장에 3열 종대로 늘어선 20여명의 공작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는 윤 공작원을 애써 외면했다. 그 순간 장정길 공작원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몽둥이로 20대씩 때려야 한다”고 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낮게 떨리고 있었다. 기간병들은 직전 “윤태산은 북한 적지에서 임무 수행은커녕 나라를 팔아먹을 놈이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 공작원에 몽둥이 찜질로 동료 살해시켜 발을 땅속에 파묻은 듯 공작원들은 버텼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등이 떠밀린 순서대로 나아가 몽둥이를 들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공작원 뒤에는 실탄을 장전한 기간병들의 눈빛이 서슬 퍼렜다. 대낮의 몽둥이질에 비명을 내지르던 윤 공작원은 이내 피를 토한 채 그렇게 숨이 멎었다. 윤 공작원의 사망을 확인한 파견 대장은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공작원들은 윤 공작원의 시신을 불에 태운 뒤 바다에 띄웠다. 그날 밤 공작원들에게는 와룡 소주(1970년대 인천의 3대 소주로 알려짐)가 공급됐다. “하찮은 일로 정든 동료를 때려죽이게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시체를 디젤 기름에 튀겨 바다에 띄우도록 만든, 잔악한 비인간성에 몸서리쳤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비참한 말로를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임성빈 공작원·재판 기록) 북한 침투를 위해 출동했다가 백령도에서 회군한 실미도 부대의 기간병과 공작원은 목표를 잃고 방치됐다. 북파 작전은 기약 없이 미뤄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존재 자체도 잊혔다. 부대 안에서 기간병의 가혹 행위는 일상이 됐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분노한 공작원의 하극상이 빈번했다. 윤태산 공작원의 어이없는 죽음은 훈련용 평행봉을 만들러 무의도에서 나무를 베던 중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됐다. ━ "술 사달라" 주먹다툼이 화근 윤 공작원은 박모 기간병과 단둘이 떨어져 나무를 베다 “술 한 잔 사달라”고 윽박질렀고, “안 된다”는 박 기간병과 싸움을 벌였다. 한참 주먹다짐을 한 두 사람은 “부대로 복귀하면 남들한텐 없던 일로 하자”고 약속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박 기간병을 본 동료 기간병에게 하극상 사실이 드러났다. 거듭된 추궁에 박 기간병은 “윤태산한테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김 중사가 실미도 밖의 상급 부대에 가 있던 파견 대장에게 무전을 해 ‘운동선수 규칙 위반했으니 귀대 바람’이라는 암호로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파견 대장은 그날 오후 4시쯤 부대로 돌아온 뒤 사무실에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김 중사와 이야기했습니다. ‘그놈 주먹이 세니까 꽁꽁 묶어서 천장에 매달아 놓을까 아니면 그대로 둘까 어떻게 할까’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한모 기간병·재판기록) 윤 공작원은 며칠 동안 내무반에 감금당했다가 끝내 동료들의 몽둥이찜질이라는 어이없는 처벌로 사망했다. 공작원들은 재판도 없이 한낱 부대장의 지시에 의해 사적(私的) 처형에 처한 것이다. 실미도 부대 생존 공작원들은 군사재판 등에서 “입소 당시의 선서에 따라 온갖 가혹 행위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본인은 복무 중 고의과실을 막론하고 부대에 해로운 행위를 자행할 경우 어떠한 극형도 감수하겠습니다.”(1968년 5월 ‘실미도 부대’ 창설 당시 공작원 선서 내용 중 일부) ━ "형법 절차 없는 살해는 형사상 범죄행위" 국가라는 이름으로 공작원에게 가혹 행위를 일삼은 기간병의 행위는 정당화할 수 있을까. 기간병들은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와 면담에서 “하극상을 묵인하면 우리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당시에는 공작원 대부분이 사형수나 무기수 출신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 가혹 행위를 할 때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설령 실미도 부대원들이 사형수나 무기수라고 사적 처벌이 정당화될까. 더구나 실미도 부대원은 일부 행불자나 무연고자가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20~30대 청년이었다. 안김정애 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2과장은 “군 형법 등 적법한 절차 없이 인민재판을 하듯 윤 공작원을 살해한 건 명백한 인권침해이자 형사상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미도 부대에서는 이런 방식의 살인이 윤 공작원 한 명에 그치지 않았다. 다음 회에서 계속. ※본 기사는 국방부의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2006년)와 실미도 부대원의 재판 기록, 실미도 부대 관련 정부 자료, 유가족·부대 관련자의 새로운 증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심석용·김민중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지난 기사 보기〉#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https:/news.joins.com/issue/11272 2020.09.2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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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김강훈, 그야말로 '리틀 설민석'

'선을 넘는 녀석들' 김강훈이 '리틀 설민석'으로 등극해 활약을 펼쳤다. 29일 방송된 MBC 역사 탐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 31회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5일간 고립됐던 남한산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배움 여행이 담겼다. 모르는 게 없는 '역사 꿈나무' 김강훈의 활약이 펼쳐졌고, 이날 방송은 4.1%(2부,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시청률을 기록했다. 아역 배우 김강훈은 병자호란이 왜 일어났는지 설민석의 설명을 들으며 역사 이야기에 푹 빠졌다. 설민석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청의 요구에 선택의 순간에 놓인 인조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들을 보낸다', '전쟁을 한다'의 선택지 중 김강훈은 전현무와 함께 '실리'를 선택, "백성들을 생각 해야죠"라며 전쟁을 반대했다. 이는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의 입장이었다. 당시 조선은 주화파와 대의를 지키고 오랑캐와 맞서야 한다는 척화파가 의견 대립을 펼쳤다. 이런 가운데 인조가 가짜 세자를 청에 보내 들키는 사건이 발생했고, 시간이 흘러 결국 병자호란이 터지게 된 것. 남한산성에 도착한 김강훈과 '선을 넘는 녀석들'은 청나라 군에 포위된 채 45일간 항전을 펼친 인조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이 과정에서 김강훈은 원래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을 가려 했지만, 말이 움직이지 않아 남한산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강훈은 야무지게 예습해 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물론, 깜짝 역사 지식을 방출하며 멤버들을 놀라게 했다. 병자호란 이야기 외에도 김강훈은 북한군이 청와대에 침입하려 했던 1968년 김신조 사건을 안다고 말했다. 근현대사까지 모르는 게 없는 김강훈의 활약에, 김종민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너 몇 년 생이야?"라고 물어 웃음을 자아냈다. 특히 김강훈은 설민석과 같은 역사 관점을 보여주며, '리틀 설민석'에 등극했다. 김강훈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몽진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도 하나의 전략이잖아요. (백성들에게) 미움은 많이 받았겠지만, 왕이 살아야 나라도 사니까"라고 말했다. 앞선 탐사에서 설민석 역시 선조의 몽진을 전쟁의 전략으로 보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역사 똑똑이' 김강훈은 귀엽고 순수한 매력으로 멤버들을 미소를 유발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유일하게 성문을 열고 나가 전투를 벌였던 남한산성 북문에 도착했고, 김강훈은 성문 밖 사람들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멤버들은 김강훈이 귀여워 "오랑캐인 줄 알았지?"라고 짓궂게 놀렸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필구 역할로 사랑받은 김강훈은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역사 천재로 깜짝 활약을 펼쳤다. 이에 설민석은 "나이는 어리지만, 보통이 아니다"라고 칭찬했다. '역사 꿈나무' 김강훈의 똑 소리 나는 모습이 '남한산성 병자호란' 특집을 더욱 빛나게 했다.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는 매주 일요일 오후 9시 5분에 방송된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 2020.03.3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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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인생의 스승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이 나던 날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 꿈이었던 군인도 경찰도 되지 못한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 3년만에 다시 건국대 야간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학교 1학년이라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종로의 유명한 관상가인 B씨를 찾아갔다. 딱지처럼 생긴 순번표를 받고 반나절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B씨 앞에 앉게 됐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볼 것도 없으니 그냥 가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누군가 B씨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반신에 풍을 맞았는지 얼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너 혹시 차총경 아들 차길진 아니니?" 너무 반가웠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비서실장직을 지낸 차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와 성이 같아 형제처럼 지내셨고, 나도 아버지를 따라 경무대에 있는 차 선생님 댁에 몇 번 다녀오곤 했다. "얘는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드님이오. 다시 좀 봐주시오." 차 선생님의 말에 B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종교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나와 같은 길을 갈 것이오. 어쩌면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소." 말도 안됐다. 야간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내게 종교가 아니면 관상을 보라니.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그 후로도 차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선생님은 국회의원에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몸에 풍이 오는 바람에 잠시 쉬며 B씨 일을 돕고 있었다. 이미 침술의 명인으로 사주와 관상에도 높은 경지에 올랐던 선생님은 내 사주를 보시고는 "길진아, 너는 사주는 좋지만 눈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네 눈은 단명상이지만 그것을 면하려면 종교 계통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종교계통의 일만은 정말 하기 싫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폐결핵으로 시한부판정을 받고 다시 차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연신 피를 토하며 기침하는 나를 보면서도 "너는 죽을 사람이 아니다. 사주는 절대 못 속인다. 큰 일을 할 사람이니 기운 내라"며 어깨를 때려주셨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나는 죽기살기로 건강을 회복해 결국 종교인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얼마 전 차 선생님이 94세 생신을 맞으셨다. 나는 기쁜 마음에 인편으로 용돈을 챙겨 드렸다.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네게 용돈도 받고 참 기쁘다"며 건강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은 "길진아, 내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놓으셨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여셨다. "죽을 때 말이야, 자는 듯이 갔으면 좋겠다. 길진아, 네겐 그런 능력이 있지?"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선생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꼭 그렇게 해드릴께요."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소원대로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선생은 기술을 가르쳐주고, 사부는 직업을 가르쳐주며, 스승은 인생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비록 구명시식으로 영결식장에도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차 선생님은 내 인생의 큰 스승이셨다. "선생님, 제가 장지에 못가도 이해해주시겠죠? 부디 못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4.1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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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인생의 스승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이 나던 날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 꿈이었던 군인도 경찰도 되지 못한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 3년만에 다시 건국대 야간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학교 1학년이라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종로의 유명한 관상가인 B씨를 찾아갔다. 딱지처럼 생긴 순번표를 받고 반나절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B씨 앞에 앉게 됐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볼 것도 없으니 그냥 가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누군가 B씨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반신에 풍을 맞았는지 얼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너 혹시 차총경 아들 차길진 아니니?" 너무 반가웠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비서실장직을 지낸 차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와 성이 같아 형제처럼 지내셨고, 나도 아버지를 따라 경무대에 있는 차 선생님 댁에 몇 번 다녀오곤 했다. "얘는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드님이오. 다시 좀 봐주시오." 차 선생님의 말에 B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종교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나와 같은 길을 갈 것이오. 어쩌면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소." 말도 안됐다. 야간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내게 종교가 아니면 관상을 보라니.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그 후로도 차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선생님은 국회의원에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몸에 풍이 오는 바람에 잠시 쉬며 B씨 일을 돕고 있었다. 이미 침술의 명인으로 사주와 관상에도 높은 경지에 올랐던 선생님은 내 사주를 보시고는 "길진아, 너는 사주는 좋지만 눈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네 눈은 단명상이지만 그것을 면하려면 종교 계통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종교계통의 일만은 정말 하기 싫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폐결핵으로 시한부판정을 받고 다시 차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연신 피를 토하며 기침하는 나를 보면서도 "너는 죽을 사람이 아니다. 사주는 절대 못 속인다. 큰 일을 할 사람이니 기운 내라"며 어깨를 때려주셨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나는 죽기살기로 건강을 회복해 결국 종교인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얼마 전 차 선생님이 94세 생신을 맞으셨다. 나는 기쁜 마음에 인편으로 용돈을 챙겨 드렸다.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네게 용돈도 받고 참 기쁘다"며 건강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은 "길진아, 내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놓으셨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여셨다. "죽을 때 말이야, 자는 듯이 갔으면 좋겠다. 길진아, 네겐 그런 능력이 있지?"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선생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꼭 그렇게 해드릴께요."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소원대로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선생은 기술을 가르쳐주고, 사부는 직업을 가르쳐주며, 스승은 인생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비록 구명시식으로 영결식장에도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차 선생님은 내 인생의 큰 스승이셨다. "선생님, 제가 장지에 못가도 이해해주시겠죠? 부디 못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4.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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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인생의 스승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이 나던 날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 꿈이었던 군인도 경찰도 되지 못한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 3년만에 다시 건국대 야간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학교 1학년이라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종로의 유명한 관상가인 B씨를 찾아갔다. 딱지처럼 생긴 순번표를 받고 반나절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B씨 앞에 앉게 됐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볼 것도 없으니 그냥 가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누군가 B씨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반신에 풍을 맞았는지 얼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너 혹시 차총경 아들 차길진 아니니?" 너무 반가웠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비서실장직을 지낸 차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와 성이 같아 형제처럼 지내셨고, 나도 아버지를 따라 경무대에 있는 차 선생님 댁에 몇 번 다녀오곤 했다. "얘는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드님이오. 다시 좀 봐주시오." 차 선생님의 말에 B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종교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나와 같은 길을 갈 것이오. 어쩌면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소." 말도 안됐다. 야간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내게 종교가 아니면 관상을 보라니.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그 후로도 차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선생님은 국회의원에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몸에 풍이 오는 바람에 잠시 쉬며 B씨 일을 돕고 있었다. 이미 침술의 명인으로 사주와 관상에도 높은 경지에 올랐던 선생님은 내 사주를 보시고는 "길진아, 너는 사주는 좋지만 눈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네 눈은 단명상이지만 그것을 면하려면 종교 계통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종교계통의 일만은 정말 하기 싫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폐결핵으로 시한부판정을 받고 다시 차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연신 피를 토하며 기침하는 나를 보면서도 "너는 죽을 사람이 아니다. 사주는 절대 못 속인다. 큰 일을 할 사람이니 기운 내라"며 어깨를 때려주셨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나는 죽기살기로 건강을 회복해 결국 종교인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얼마 전 차 선생님이 94세 생신을 맞으셨다. 나는 기쁜 마음에 인편으로 용돈을 챙겨 드렸다.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네게 용돈도 받고 참 기쁘다"며 건강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은 "길진아, 내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놓으셨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여셨다. "죽을 때 말이야, 자는 듯이 갔으면 좋겠다. 길진아, 네겐 그런 능력이 있지?"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선생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꼭 그렇게 해드릴께요."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소원대로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선생은 기술을 가르쳐주고, 사부는 직업을 가르쳐주며, 스승은 인생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비록 구명시식으로 영결식장에도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차 선생님은 내 인생의 큰 스승이셨다. "선생님, 제가 장지에 못가도 이해해주시겠죠? 부디 못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4.15 23:57
스포츠일반

[어울림스포츠] 장애인 탁구의 전설 이해곤

이해곤(58)은 장애인 탁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곧 환갑이지만 아직도 탁구 라켓을 손에 감고 있다. 경추부상을 입은 그는 손가락을 오므릴 수 없어 라켓을 압박붕대로 감아 고정한다. 1일 서산 종합운동장 체육관에서 열린 서산시장배 장애인 탁구대회에 참가한 그는 쑥스러운 듯 "생활체육대회에는 잘 나오지 않는데"라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1988년 서울 패럴림픽 2관왕을 시작으로 2004년 그리스 대회까지 다섯 대회 연속 금메달을 따냈다. 그가 23년 동안 딴 패럴림픽 메달은 금메달 7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다. 한국 장애인 탁구는 이해곤을 앞세워 20년 동안 휠체어 탁구의 강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이해곤은 6.25전쟁이 끝난 1953년 10월 5남 3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180cm에 74kg. 20대 초반의 그는 건강했다. 병역의무를 위해 공군 입대를 결심했다. 당시 남산에 있던 병무청을 찾은 그는 공군 입대 지원서를 찾았지만, 담당 병사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때 해병대 입대 담당관이 그 옆에 찾아왔다. "해병대에 오면 32개월만 근무하면 된다. 공군보다 8개월이 짧다"고 그를 설득했다. 이해곤은 "남자로 태어났으니 해병대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해병대에 입대 지원서를 냈다. 이 선택이 그의 운명을 바꿔놨다. 한국 장애인 탁구의 미래까지. 이해곤은 5대 1의 경쟁을 뚫고 해병대에 들어갔다. 부모님은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남자답게 다녀오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가 입대할 때는 남·북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1968년 1월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해 침투했다. 김신조 목사는 생포되고 29명은 총격전 끝에 죽었다. 1명만 살아서 북한으로 달아났지만 박 대통령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4공화국은 특수부대를 만들어 북한으로 침투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이해곤도 해병 북파특수 공작대인 MIU503(일명 마니산 까치부대)에 차출됐다. 그는 "실미도 부대는 죄수들을 중심으로 만든 부대였지만, 우리는 해병대 엘리트 요원으로 이뤄진 특수부대였다. 실미도보다 더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며 "목표는 북한으로 가서 김일성의 목을 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70년대 남북 적십자 회담 등으로 화해무드가 되며 작전은 무기한 연기됐다. 그래도 MIU503부대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이해곤은 야간 특수훈련을 하다 낭떠러지에서 굴렀다. 목뼈가 부러졌다. 병상에 누운 채 국군통합병원에서 보훈병원으로 옮겨졌다. 군생활도 끝났다. 막내아들이 반신불수로 돌아오자 고혈압을 앓고 있던 아버지는 화병으로 쓰러졌고 결국 숨졌다. 이해곤도 좌절하며 6년 병상에 누워서 세월을 허비했다. 그런 그를 일으킨 것은 탁구였다. 선교사로 찾아왔던 모우숙(한국명) 씨가 그에게 재활운동으로 탁구를 권했다. 그는 "처음에는 재미도 없고 도망도 많이 쳤다. 당시 여고생 선수들과 탁구를 치면서 실력이 많이 올랐다"고 말했다. 8년간 맹훈련 끝에 서울 패럴림픽에 나가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가능성이 보이니 국가에서도 장애인 탁구에 많은 지원을 해줬다. 23년이 지난 지금 한국 장애인 탁구연맹은 1380여 명의 등록선수를 가진 큰 단체가 됐다. "장애인 탁구가 발전한 것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한 이해곤은 "나이가 들어 힘은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힘이 닿는 데까지 도전을 해볼 것이다"며 활짝 웃었다. 서산=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 2011.04.04 09:29
연예

[차길진의 미스터리 Q] 불길한 징조

최근 백두산 주변에 지진 발생 횟수가 늘어나고 수천 마리의 뱀떼가 출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옌벤조선족자치구 안투현에서 3.0 이상의 지진이 2차례 발생한데 이어 지진 발생 이틀 전인 10월7일에는 백두산 인근 도로 5km구간에서 수천 마리의 뱀떼가 출현했다고 한다. 백두산 인근에 출현한 뱀떼. 이는 불길한 징조가 아닐 수 없다. 뱀과 같은 영물은 땅의 움직임에 민감하다. 특히 백두산 인근 도로에 뱀 수천마리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상 징후가 분명한데도 중국 측은 뱀의 출현이 자연 현상이 아닌 인위적인 방생이라는 억지주장을 하고 있다. 도대체 뱀 수천 마리를 누가 무슨 수로 인위적으로 방생한단 말인가. 얼마 전 이 칼럼을 통해 나는 백두산 대폭발을 예고한 바 있다. 만약 백두산 화산이 터진다면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큰 폭발이 될 수도 있다. 이 폭발은 백두산 인근 지역 뿐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기에 빠뜨리게 될 것이다. 과거에도 백두산은 몇 차례 폭발했다. 일부 학계에서는 백두산 폭발로 인해 중국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맹위를 펼치던 발해가 멸망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대국이던 발해가 거란족의 침입 한 번에 멸망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발해의 멸망 시기는 926년으로 백두산 화산폭발도 10세기쯤으로 예상돼 거의 같은 시기라고. 이렇듯 국가에 재앙이 닥칠 때는 반드시 징조가 앞서온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8년도 일이다. 당시에는 전철이 청와대 앞 효자동역까지 다녔다. 그때 궁정동 1번지는 '칠궁'이었다. '칠궁'이란 조선시대 역대 제왕의 어머니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후궁(빈·嬪) 7인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원래 그 규모가 매우 컸다. 그런데 그해 청와대 측에서 칠궁을 헐어 도로를 내겠다고 하자 문화재위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칠궁 앞에서 시위를 하는 등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 1월 18일 칠궁을 헐기 시작하는데 공교롭게도 3일 뒤인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벌어져 칠궁 철거를 지휘했던 경찰서장이 순직하는 등 나라에 큰 변란이 생기고 만다. 결국 칠궁은 천 평 정도 소실된 채 보존이 결정됐지만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다가 33년만인 2001년에 들어서야 겨우 공개되기 시작했다. 1979년 독립문 이전 공사에도 수상한 징조가 있었다. 과거 S토건회사에서 독립문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는 공사를 맡아 진행하던 중 몇 번이나 중단 고비가 있었다. 도로확장으로 인해 옮길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 공사를 밀어붙인 사람이 바로 권력자 중의 하나였던 C씨였다. 그 결과 10월24일 독립문 이전공사는 강행됐지만 이틀 뒤인 10월26일 C씨는 대통령과 함께 10.26사태로 목숨을 잃고 만다.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는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재 한국은 4대강 사업을 진행하려 한다. 나는 4대강 사업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려되는 부분이 많을 뿐이다. 현재 영산강을 보면 심각한 물부족사태가 벌어져 4대강 사업이 시급한데 반해, 그다지 급하지 않은 낙동강 보설치 작업은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4대강 사업은 국가적인 사업이다. 이런 사업을 진행할 시 반드시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이다. 어떤 공사든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게 되면 그에 따른 재앙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시대와 역사, 인간과 자연은 반드시 일종의 '사인(sign)'을 주고받는다. 백두산의 뱀떼 출현, 칠궁철거 공사와 무장공비 침투사건, 독립문 이전 공사와 10.26사태.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4대강 공사의 무분별한 강행 시 우리나라에 어떤 예후가 닥칠지 알 수 없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0.10.25 09:16
생활/문화

[how are you ②] 간첩 김신조도 즐겨부른 ‘대머리 총각’

경상북도 울진군 간절곶에 가면 김상희의 노래비가 있다. 영일만보다 해가 0.2초 먼저 뜬다는 이곳에 ‘울산 큰애기’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지난 2000년. 그의 유일한 노래비다. 가수 김상희가 추천하는 자신의 대표곡은 뭘까. 그는 서슴지 않고 ‘대머리 총각’을 꼽았다. 그는 ‘대머리 총각’의 인기 요인을 당시 우울한 시기를 벗어나려는 사회상이 반영돼서라고 했다. 전차 통근시간 등 당시 서민들의 모습이 어필했다는 것. TV 보기도 싶지 않았고, 라디오도 벽돌장 같은 두꺼운 배터리를 달아 동네 확성기로 같이 듣던 시절, 암울한 시기를 벗어나려는 시대상이 담겨있다는 것. 이 노래는 남파 간첩 김신조도 불렀을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곡은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이라고 했다. 잔잔한 수채화풍의 서정적 노래로 가을이면 언제나 들을 수 있다는 것. ‘즐거운 아리랑’은 추천 사유가 독특하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작곡가 김강섭씨에게 직접 부탁해 만들어졌다. 한이 덜덜 묻어나는 아리랑이 아니라 활기차고 즐겁게 부를 수 있는 아리랑을 듣고 싶다는 주문이었다. 도쿄국제가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특히 고연전 때 응원가로도 많이 불렸다. 빼놓을 수 없는 곡이 ‘울산 큰애기’다. 그는 “이 곡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가는 참전 용사 모자에 부적처럼 써 갖고 갔던 곡으로 유명하다. 이 노래로 노래비까지 갖게 되었고, 지금도 팬들이 늘 불러달라고 하는 곡”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올 1월 3년만에 ‘괜찮아’라는 신곡을 발표했는데 경제 상황이 좋아져 선견지명이 있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박명기 기자 2009.11.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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