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는 이제 서울과 강릉을 세 시간 거리로 당겨 놓았다. 1975년 첫 개통 당시만 해도 구불구불 이어지던 2차로 도로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새로운 길은 시간이란 선물을 가져다 준 대신 ‘여유’를 앗아 갔다.
4차로로 쭉 뻗은 길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일부 구간이 2차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왕래하는 차량이 거의 없어 앞차를 추월하기 위해 중앙선을 넘어서던 ‘짜릿함’은 없지만 오히려 ‘한적함’이 향수에 젖기에 충분한 분위기를 제공한다.
길은 단순한 의미로 본다면 하나의 교통 수단에 불과하다. “빨리 빨리”에 익숙해진 우리는 길 위에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갖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관념적 의미를 부여하면 길은 ‘여행’이란 뜻을 갖게 된다. 특히 동양에서 여행은 곧잘 인생에 비유된다. 세상은 여관. 사람은 나그네. 인생살이는 길을 가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는 길을 가면서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를 무시한다면 여행이나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지금은 잊혀진 ‘구영동고속도로’는 짧지만 한껏 여유를 부리기에 제격이다. 노란색의 중앙선은 아직도 선명하고. 어설프기는 하지만 당시 차량 보호를 위해 만들어 놓은 가드레일도 건재하다. 강릉에서 서울 방향으로 면온 인터체인지(IC)를 지나 면온터널로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같이 이어지는 2차로 도로가 바로 구영동고속도로 구간의 일부다.
총 234.4㎞의 노선 가운데 대부분은 4~8차로 도로로 바뀌면서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일부 곡선 구간은 따로 떨어져 나와 ‘구영동고속도로’라 불리고 있다. 과거 ‘4번’의 번호를 달았던 이 길은 이제 강원도 지역을 잇는 6번 국도로 변해 있다.
둔내~장평간 17㎞. 속사~진부간 6.1㎞. 횡계~강릉간 14.9㎞ 등 38㎞이다. 이 가운데 옛 대관령휴게소로 이어지는 횡계~강릉 구간은 아직도 이용하는 차량이 많은 편이지만 나머지는 하루에 ‘수십대’만이 달릴 뿐이다.
이 중 영동 1·2터널이 있는 둔내~장평 구간은 옛 영동고속도로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영동고속도로 둔내IC에서 나와 현대성우리조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둔내 자연휴양림으로 향하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옛 영동고속도로 둔내~장평 구간은 둔내 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시작된다.
곧이어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를 지나면 쭉 뻗은 길이 산으로 이어진다. 약 2㎞쯤 올라가면 청태산 자연휴양림 입구이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다시 왼쪽. 왼쪽으로 돌면 다시 오른쪽 등 길은 구절양장으로 끝을 보이지 않는다. 해발 780m라는 작은 이정표를 지나니 커다란 터널 입구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영동 1터널이다. 바로 앞에는 가로 약 1.2m. 세로 약 60㎝의 준공비에 새겨진 시공자(협화실업)·착공(74.3.26)·준공일(75.9.30)이 세월의 흐름을 알린다.
이용자가 없는 탓인지 터널에는 조명도 없다. ‘어두우니 라이트를 켜시오’라는 팻말만 덩그러니 서 있다. 터널을 지켰던 초소도 인적이 끊긴 데다 봄을 재촉하는 비까지 겹쳐 을씨년스럽다. 터널을 지나자 시야가 확 트인다. 일자로 쭉 뻗은 내리막길이 과거 고속도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길 옆에는 버들개지가 빗방울을 흠뻑 머금은 채 봄을 재촉하고 있다. 나뭇가지도 수정처럼 맑은 물방울로 나그네의 눈을 희롱한다.
길은 면온IC를 지나 다시 산으로 접어든다. 고갯마루에 영동 2터널이 조용히 숨어 있을 뿐 모습은 구불구불. 지나온 길과 별반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