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의 백인 미녀. 서양인들의 로망이 담긴 인형이 미국 마텔사의 '바비인형'이다. 그러나 그 아성을 순식간에 허문 것이 바로 라이벌 인형 '브라츠'였다.
2003년 2월 뉴욕토이쇼는 미국 MGA사가 출시한 '브라츠'를 살펴보려는 세계 각국 바이어들로 북적거렸다. MGA의 초대를 받은 나는 그 곳에서 MGA 사장 아이작을 만나 '브라츠'의 한국 유통을 협의했다. 아시아에서는 한·일 동시 출시를 하기로 했다. 당시에 '브라츠' 유통권을 갖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2004년 초봄 일본 롯폰기에 자리한 아시아 최대 나이트클럽 베르파레에서 '브라츠' 런칭쇼가 열렸다. 난 그날 일본 최대 음반사인(가수 보아·소녀시대 소속사) 아벡스의 회장과도 만나 일본 쪽 진행 상황을 살폈다.
2001년 처음 등장한 '브라츠'는 '바비인형'에게 없던 개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바비인형'은 고급스러운 이미지만 있었지만, '브라츠'는 촌티가 나면서도 화려한 분장으로 그것을 커버했다. 입술이 두툼한 유색인종도 '브라츠'의 주인공이 됐고, 청바지 스타일 등으로 멋을 부리기도 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브라츠'는 연간 10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며 여아 완구 시장에서 약 40%의 점유율을 차지할 정도로 '바비 인형'의 명성을 흔들었다.
위협을 느낀 마텔은 소송을 통해 '브라츠'의 상승세에 제동을 걸었다. 자사 디자이너였던 카터 브라이언트가 퇴직후 바비 신모델을 MGA에 넘겨줬다며 저작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반면 MGA는 '브라츠'는 독창적인 상품이라고 맞섰다.
재판부는 1심에서 마텔의 손을 들어주며 모든 것을 마텔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이로 인해 MGA는 사실상 '브라츠'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MGA가 항소를 하면서 1심 판결이 뒤집혔다. 지난해 4월 캘리포니아 연방 배심원단은 마텔이 MGA를 상대로 제기한 저작권 침해 소송을 기각했다. MGA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 동안 시장의 판도는 역전됐다.
내가 런칭한 '브라츠'는 생각만큼 한국에서 많이 팔리지 않았다. 2004년 무렵만 해도 다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국에선 입술 두툼한 '브라츠'가 정서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처럼 다문화에 대한 인식이 생긴 환경이라면 좀 더 환영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인형의 주타깃층인 아이들이 포털로 몰려가 오프라인이 위축된 환경 탓도 있다.
'브라츠'는 미주·유럽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을 점유하며 마텔을 휘청거리게 한 아이템이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면서 큰 교훈을 얻었다. 아무리 잘 나가도 한 가지에 안주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대체 상품이 나올 수 있다고 가정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