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오달수(48)가 아직 빛을 보지 못 한 후배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10년은 해봐라." 이는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기도 하다. 21세 때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오달수는 영화 판으로 넘어와 10년 이상 버텼다. 영화 '올드보이(2003)'를 통해 충무로에서 이름을 알린 지 13년 만에 첫 단독 주연 영화 '대배우'를 내놓게 됐다. '대배우'는 무명 연극 배우 장성필의 삶을 그린 작품.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버무려져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연극·영화 등 60편이 넘는 작품을 했고, 그 중 무려 7개의 영화가 천만 클럽에 가입하며 '천만 요정'으로 불리지만, 정작 그는 흥행엔 큰 욕심이 없다. '대배우'가 천만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에 대해 "꿈도 안 꾸고 있습니다. 망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대배우'를 첫 주연작으로 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인연, 의리 때문에 하게 됐어요. 그게 제일 큰 이유였다. 시나리오 보다 석민우 감독과의 인연이 더 큰 이유였어요. 사실 그동안 작품을 할 때도 인연을 중시 했어요. 물론 박찬욱 감독님 작품은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한 것도 있지만요.(웃음) 석민우 감독과의 인연은 영화 '박쥐'때부터였어요. 그때 작품을 하게 되면 같이 하자고 약속했어요. 오래 묵힌 약속은 시간이 오래 될 수록 더 지켜줘야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썩 기쁘진 않았다고 말했죠. "저랑 상황이 비슷한 얘기를 연기로 한다는 게 반갑다기 보다는 좀 불편한 느낌이 있었죠. 힘든 시절 얘기를 하는 거니깐요. 제 딸이 '연기하면 안 돼?'라고 물었을 때 제가 고민도 안 하고 '절대 안 돼'라고 그랬거든요. 연기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깐요. 저 역시 그 힘든 시기를 겪었고요. 제 힘든 과거를 다시 마주하는 것 같고, 그래서 썩 기쁘지 만은 않더라고요."
-'한 번도 웃기려고 연기한 적이 없다'라고 적힌 영화 포스터 문구가 인상적이에요. "그게 제가 몇 년 전 인터뷰 때 직접 한 말이에요. 코미디를 할 때도 웃기려고 연기한 적 없어요. 작정하고 웃기려고 하는 순간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관객들이 못 봅니다. 억지로 웃기려는 게 티 나잖아요. 아마 코미디 연기를 하는 다른 많은 배우들도 저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코미디 연기는 훨씬 더 진지하게 접근해야해요. 상황이 웃겨야지, 배우의 테크닉으로 웃기는 건 말도 안되거든요."
-감동 코드가 담긴 영화예요. 그간 코믹한 캐릭터 위주로 연기를 하면서 쌓인 갈증이 해소 됐나요. "갈증이 해소됐다기 보다는 재밌었어요. 이번 영화에선 눈물도 흘려봤어요. 아마 영화에서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한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대중들이 원하고, 무엇보다 감독님들이 원해서 코미디 연기만 주로 해왔죠. 잘 할 수 있는 부분만 하는 게 어떻게 보면 맞긴 해요. 못 하는 쪽의 연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죠. 잘하는 것만 보여줘도 모자를 판이니깐요. 그래도 진중한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번에 오래간만에 해보니깐 재밌더라고요."
-극 중 무명 연극 배우가 처음 영화를 찍는 장면에서 98번 NG를 내는 장면이 있죠. 실제 경험담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제가 영화 '해적, 디스코왕 되다(2002)'에 단역으로 나올 때만 해도 필름 시대였거든요. 그래서 NG를 내면 촬영 감독님들이 욕도 하고 혼내던 시기였어요. 연기할 때 프레임 밖으로 나가면 '어디서 저런 애를 데려왔어?'라고 호통도 치셨죠. 그래도 전 지금까지 20번 이상 NG를 낸 적은 없어요. NG라고 하긴 그런데요. '좋은놈,나쁜놈,이상한놈' 찍을 때 좀 오래 찍었던 기억이 있어요. 제가 실수를 했다기 보다는 크랭크인 하는 첫 날 첫 촬영이라서 감독님이 좀 공들여서 찍었어요. 한 작품을 만들 때 필름을 20만자 정도 쓴다고 하는데 그 날 저랑 송영창 선배님이랑 둘이 나오는 신만 5000자를 썼다고 하더라고요."
-극 중 장성필이 다리가 불편한 연기를 잘 하고 싶어서 망치로 발목을 치는 장면이 있잖아요. 실제 그런 배우를 본 적 있나요.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실제로 연기할 땐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본 적도 없어요. 영화니깐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인거죠. 배우가 연기를 해야지 그렇게 하면 안 돼죠."
-장성필의 아내가 장성필에게 '누굴 위해서 연기를 하냐'는 질문을 던지죠. 그 질문을 배우 오달수에게 하고 싶네요. "배우는 이기적인 직업이에요. 말로는 가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장성필도 결국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 아닐까요. 제 주변에 아주 잘 나가는 회사 임원인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난 네가 부럽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친구야 말로 가족들을 위해 꿈을 포기하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배우는 가족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연극만 하면 배고프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연극만 하다가 영화를 하게 된 건 가족들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나요. "가족을 위해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어요. 영화를 하게 된 건 정말 운명적이었어요. 물론 영화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은 있었죠. 다른 분들까지 욕 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제 얘기만 하자면, 제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올드보이'를 만나기 전엔 '영화는 안 해'라며 괜한 자존심을 세웠어요. 그런데 속으로는 '나는 언제쯤 영화를 한 번 할 수 있나.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까'라는 생각을 했죠. 그러다가 정말 운명적으로 '올드보이'를 만나게 됐고, 기회가 이어져 여러 영화를 하게 됐죠."
-아직 빛을 보지 못 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후배들에겐 어떤 조언을 하나요. "연기지도는 못 해요. 맨날 이야기해봤자 각자 받아들이는 게 달라서 결국 얘기하는 저만 복장 터지거든요. 나쁜 습관 정도는 지적해주긴 하죠. '어떻게 해야합니까. 계속 연기를 해야할까요' 등의 고민을 하는 후배들에겐 시간을 갖고 해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공자 같은 성인은 3개월만 해보면 이게 내 길인지 아닌지 안다는데 우리 같은 범인은 10년 정도는 해봐야 알지 않겠어요? 그러니 10년 정도 해보고 결정하라고 이야기해줘요. 저도 그랬고요. 연기 뿐만 아니라 세상 일이란 게 3~4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알게 되고 10년이 지나면 전문가가 되지 않나요."
-고 추성웅 선생의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연기를 하는가"라는 말이 좌우명이라고. "그건 변함없어요. 이번에 배우 캐릭터를 연기하다보니깐 제 가면이 자꾸 깨지더라고요. 영화 속에서 어색한 부분이 나오면 틀림없이 오달수가 나온 것이에요.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난 뒤 카메라 앞에 서면 다 잊어버리고 가요. 이번에도 그렇게 연기를 했는데 배우 캐릭터를 맡아서 그런지 자꾸 제 모습이 나와서 혼났어요. 배우가 연기를 하니깐 그런 것 같아요. 차라리 음악가나 다른 예술가가 돼 봤더라면 연기할 때 더 다른 색깔을 입힐 수 있고, 연기에도 도움이 됐을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출연작 중 천만영화가 7편이나 된다. 이쯤 되면 '아, 이 영화는 천만이 되겠구나'란 감이 올 것 같은데요. "'7번방의 선물' 때 이환경 감독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이 영화는 천만 들어요'라고 했죠. 감독님이 말이라도 고맙다고 해서 '이런 영화가 천만이 안되면 어떤 영화가 되겠냐'라고 했었어요. '7번방의 선물' 시나리오를 읽을 땐 두 세번 정도 도저히 읽어나갈 수 없는 순간이 있었어요. 눈물이 나서 도저히 계속 못 읽겠더라고요. 그렇게 제 마음을 크게 흔든 영화는 잘 된 것 같아요. 물론 '암살'이나 '도둑들'은 워낙 출연하는 배우가 빵빵해서 천만을 바라보고 시작한 영화이겠지만요."
-이번 영화는 어떨 것 같나요. 천만 가능할까요. "꿈도 안 꾸고 있습니다. 망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 손익분기점이 100만인데 걱정이네요. 객관적으로 영화를 평가할 순 없겠지만, 오락 영화가 아닌데도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꿈 이야기도 나오고 가족 이야기도 나오고,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뭔가 하나를 마음 속에 품어가셨으면 좋겠어요.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고, 지겹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김연지 기자 kim.yeonji@joins.com 사진=박세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