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간 48주년을 맞이했다. 창간 기념으로 본지와 나이가 같은 축구 슈퍼스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1990년대 세계 최고의 선수로 위용을 떨쳤다. 세계 축구팬들은 그들로 인해 열광했고, 세계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후배 선수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지금껏 회자되는 선수들이다.
◇ 베르캄프
데니스 베르캄프는 '섀도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로 세계 축구 역사에 기록돼 있다.
지난 1986년 네덜란드 아약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 인터 밀란(이탈리아)과 아스널(잉글랜드) 등을 거치며 세계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평가 받았다.
최전방 공격수 밑에서 활발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그의 발놀림은 세계를 열광시켰다. 특히 베르캄프의 우아한 볼터치와 정확한 킥능력은 모든 공격수들이 본받아야 할 정석으로 통했다.
그는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상징적 공격수였다. 리그 우승은 한 번에 그쳤지만 독보적인 킬러 본능으로 리그를 지배했다. 아약스에서 237경기 출전해 122골을 넣었다. 지난 1991년부터 1993년까지 3년 연속 득점왕에 오른 것이 그의 존재감을 입증하고 있다. 1995년 아스널로 이적한 뒤에는 423경기에 출전해 123골을 성공시켰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3회 우승을 차지했다.
네덜란드 대표팀에서도 영웅이었다. 그는 지난 1998 프랑스월드컵 4강 주역이었다. 또 A매치 79경기에 출전해 37골을 넣으며 네덜란드 대표팀 역대 득점 4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베르캄프는 지난 1993년 발롱도르 2위까지 올랐다.
◇ 바티스투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야생마처럼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모습은 세계 축구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바티스투타는 스피드·제공력·패싱력·슈팅·골결정력 등 최전방 공격수로 모자람이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 세리에A(1부리그) 피오렌티나의 전설이다. 지난 1991년부터 2000년까지 322경기에 출전해 207골을 넣었다. 207골은 피오렌티나 역대 개인 최다골 기록이다.
바티스투타는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불린다.
돈을 따라 쉽게 팀을 옮기는 프로 세계에서 바티스투타는 달랐다. 그는 피오렌티나와 의리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피오렌티나는 지난 1993년 세리에B(2부리그)로 강등됐다. 당시 세계 정상급 공격수로 평가받던 바티스투타를 원하는 팀이 많았다. 하지만 피오렌티나에 남아 의리를 지켰다. 그는 피오렌티나를 2부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1년 만에 다시 1부리그로 올려놓았다.
2000년 AS로마로 이적한 바티스투타는 친정팀 피오렌티나와 맞대결에서 골을 넣었다. 그는 골 세리머니를 하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피오렌티나팬들도 바티투스타가 골을 넣었을 때 야유가 아닌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바티스투타가 세계 축구사에 남긴 감동적인 명장면이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최고의 공격수였다. 지난 1994 미국월드컵부터 2002 한일월드컵까지 3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했다. 코파 아메리카 2회 우승을 이끌었다. 그가 대표팀에서 넣은 골은 54골이다. 역대 2위의 기록이다. 1위는 리오넬 메시(30·바르셀로나)의 58골이다.
◇ 칸
독일 골키퍼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단연 올리버 칸이다.
그는 독일 분데스리가 상징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이자 독일 대표팀의 역사였다.
칸은 지난 1994년부터 2008년까지 14시즌 동안 뮌헨의 골리였다. 뮌헨에서 총 632경기에 출전한 그는 뮌헨 역대 2위의 기록을 품고 있다. 그는 뮌헨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누렸다. 리그 우승 8번, 포칼컵 우승 6번을 일궈 냈다.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정상에 섰다. 지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 연속 UEFA 최고의 골키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발롱도르는 3위까지 두 번 올랐다.
대표팀에서도 눈부셨다. 2002 한일월드컵은 칸의 월드컵이었다. 역대 최약체 독일 대표팀이라는 평가 속에 독일은 결승까지 진출했다. 칸의 힘이었다. 칸은 신들린 선방쇼를 펼치며 독일을 결승 무대까지 이끌었다. 마지막 일전에서 브라질에 패배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칸의 존재감은 우승만큼이나 강렬했다. 최우수선수상인 골든볼이 우승과 함께 8골로 득점왕에 오른 브라질 호나우두(41)가 아닌 칸의 손에 쥐어진 이유였다.
◇ 홍명보
한국에도 1969년 스타가 있다. 바로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다.
그는 K리그 포항 스틸러스의 레전드로 이름을 날렸다. 지난 1992년 포항을 우승으로 이끌며 MVP에 올랐다. 이후 일본 J리그 가시와 레이솔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LA 갤럭시에서도 활약했다.
한국 대표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지난 1990 이탈리아월드컵부터 2002 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에서 최초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수비수지만 월드컵에서 2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최고의 장면은 단연 2002 한일월드컵이다. 그는 주장으로 한국을 이끌며 아시아 축구 최고 성적인 4강 신화에 앞장섰다. 홍명보는 아시아축구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또 국제축구연맹(FIFA) 선정 100인에 포함된 유일한 아시아 선수이기도 하다. 아시아축구연맹(AFC)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 대표팀에서 136경기를 뛰며 역대 최다 출전 기록을 갖고 이는 이 역시 홍명보다.
◇ 그 외 전설들
1969년생 스타들은 또 있다.
동유럽의 호나우두로 불린 프레드락 미야토비치와 현재 토리노(이탈리아) 감독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시니사 미하일로비치 그리고 아스널의 전설적인 골키퍼 옌스 레만 등도 그 주인공이다.
또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콘테 신드롬'을 일으키며 첼시를 우승으로 이끈 안토니오 콘테 역시 1969년생이다. 한국 축구팬들에게도 익숙한 이란 축구의 전설 알리 다에이도 그렇다. 그는 지난 1996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시안컵 8강전에서 한국을 상대로 4골을 폭발시킨 킬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