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부터 은퇴까지…사진으로 보는 이승엽의 역사


이승엽의 야구 열정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이승엽은 여섯 살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게 없냐"고 묻자 그는 "동네 형들이랑 야구하고 싶다. 방망이와 글러브를 사달라"고 했다. 이춘광씨는 "그 후 승엽이가 동네 유리창을 자주 깨트려 변상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승엽은 집 안이든 앞 마당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혼자 공을 던지며 놀았다. 이승엽은 "공부보다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며 웃었다.   

중앙초등학교 시절 야구대회 입상 뒤 이승엽이 부를 대표해 메달을 받고 있다.

동덕초등학교 4학년 재학 시절. 이승엽은 대구 지역 멀리 던지기 대회에서 입상했다. 이를 눈여겨 본 중앙초등학교 신용승 선생이 야구 입문을 권유했다. 이승엽은 정규수업을 마치면 집에 책가방만 던져 놓고 중앙초등학교로 달려갔다. 야구를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결국 아버지와 기 싸움 끝에서 승리했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야구만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허락을 받았다. 이춘광씨는 "마치 가둬 놓은 동물이 제 우리 문을 열어준 것처럼 좋아하더라"고 떠올렸다.  

'국민 타자'의 재능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투수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경북고 재학 시절이던 1993년에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돼 투타에서 고른 활약을 펼치며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초등학교 시절 자택에서 섀도 피칭을 하는 이승엽 (우측 최상단)
초등학교 시절 자택에서 섀도 피칭을 하는 이승엽 (우측 최상단)

그의 야구 인생은 1995년 삼성 입단과 동시에 바뀌었다. 이승엽은 늘 "타자는 취미"라고 생각했다. 투수가 하고 싶었다. '왼손 박철순'을 꿈꿨다. 하지만 구단의 권유에 타자로 전향했다. 입단 기자회견을 하고 며칠 뒤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이승엽은 그때만 해도 "과연 내가 타자로 잘 될 수 있을까" "1년만 시한부로 할까" 하는 마음도 내심 품었다.

기우였다. 이승엽은 천재였다. 게다가 야구 열정과 노력도 남들보다 한 수 위였다. 곧 결과로 나타났다.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전 OB 베어스)와 한국 프로야구 역대 가장 뜨거운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그가 꼽는 최고 라이벌 중 한 명이 우즈였다. 이승엽은 1998년 홈런 38개를 때려 내 42개를 기록한 우즈에 졌다. 하지만 이듬해 홈런 54개로 첫 홈런왕에 올랐다. 2001~2003년에도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다.

2003년 10월 2일 대구 롯데전. 이승엽이 대망의 시즌 56홈런,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뒤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이승엽과 아내 이송정씨가 아시아 신기록을 달성한 이승엽에게 축하의 볼 키스를 건네고 있는 장면

특히 2003년에는 56홈런으로 아시아 개인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작성했다. 야구장에 '잠자리채 열풍'을 몰고왔다. 이승엽의 홈런 공을 잡으려는 야구팬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전국의 야구장 외야석을 메웠다. 이승엽은 "1998년에는 22살의 어린 나이였다. 내 자신을 못 이겼다. 하지만 스스로를 넘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며 "1998년 비록 홈런왕에 실패했지만 그때 경험으로 노하우가 쌓였다. 훗날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떠올렸다.

2002년에는 양준혁, 마해영과 중심 타선을 이뤄 삼성의 오랜 숙원이던 한국시리즈 우승 한을 풀었다. 당시 LG와 한국시리즈 6차전은 구단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였다. 삼성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앞섰지만 6차전 8회까지 3점 차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9회말 다름 아닌 이승엽이 극적인 동점 3점 홈런를 작렬했다. 이후 마해영의 결승 홈런까지 나와 삼성은 창단 첫 우승을 확정했다. 이승엽 스스로가 꼽는 홈런 베스트5 가운데 하나다. 

이승엽은 이후 국위선양에 앞장섰다. 2004년 일본 지바 롯데에 입단한 그는 2006년부터 일본 최고 명문팀 요미우리에서 뛰었다. '요미우리 70대 4번 타자'라는 타이틀도 달았다. 자부심이 컸다. 이뿐 아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대회에선 고비마다 극적인 홈런을 터트리며 '해결사'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 야구에 '8회의 기적'이라는 단어를 선물한 타자가 바로 이승엽이다. 그래도 그는 늘 "다른 선수들이 다 밥상을 차려 놓았을 뿐이다. 대표팀 전원이 모두 잘해서 우승한 것이다"며 "후배들이 더 많이 고생했는데 나 혼자 부각이 돼서 항상 미안하다"고 스스로를 낮췄다.

지금은 전설이 된 장면. 2008 베이징올림픽 한일전서 승부를 가르는 투런홈런을 때려 낸 뒤 양팔을 들어 올리며 1루를 돌고 있다.

지금은 전설이 된 장면. 2008 베이징올림픽 한일전서 승부를 가르는 투런홈런을 때려 낸 뒤
양팔을 들어 올리며 1루를 돌고 있다.


2012년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이승엽은 다시 '전설'의 행보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역대 개인 통산 최다 홈런(465개), 최다 타점(1495개), 최다 득점(1351개), 최다 루타(4066개), 최다 2루타(464개) 기록을 모두 갈아 치웠다. 2003년 세계 최연소 300홈런에 이어 2014년에는 역대 최고령 3할-30홈런-100타점 기록도 세웠다. 통산 최다 기록은 물론 최연소·최고령을 비롯한 전인미답의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승엽은 늘 강했다.  

이승엽은 2014년부터 은퇴 시기를 마음 속에 정해 놓았다. 2017년을 마지막 시즌으로 여겼다.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보기 드문 '예고 은퇴'를 실행했고, 전 구단 선수단과 팬의 작별 인사 속에 '은퇴 투어'도 진행했다. 향후 진로는 아직 미정이다. 다만 당분간은 '야구 선수' 이승엽이 아닌 '아빠' 이승엽으로 지낼 예정이다. 그는 "선수로는 80~90점을 줄 수 있는데 남편, 아빠로는 50점도 안 된다"며 "아내(이송정씨)를 보면 항상 안쓰럽다. 자기 시간도 없이 애들 뒷바라지를 한다. 은퇴 후엔 분명히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가 될 것이다"고 다짐했다.

①2011시즌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소속의 박찬호(왼쪽)와 이승엽.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마친 뒤 공교롭게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②1990년대 후반 삼성 신예 시절의 이승엽. 삼성의 플로리다 베로비치 전지훈련에서 LA 다저스 코치와 사진 촬영을 했다. ③이춘광씨는 이승엽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승엽 기록관’ 지킴이이기도 하다. 자택에 모아 놓은 이승엽 관련 기념구를 들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④이승엽의 유니폼 배번. 이승엽의 역사이자, 시대를 가로 지은대타자의 기록이다.

①2011시즌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소속의 박찬호(왼쪽)와 이승엽.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마친 뒤 공교롭게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②1990년대 후반 삼성 신예 시절의 이승엽. 삼성의 플로리다 베로비치 전지훈련에서 LA 다저스 코치와 사진 촬영을 했다.
③이춘광씨는 이승엽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승엽 기록관’ 지킴이이기도 하다. 자택에 모아 놓은 이승엽 관련 기념구를 들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④이승엽의 유니폼 배번. 이승엽의 역사이자, 시대를 가로 지은대타자의 기록이다.


역사적인 이승엽의 선수 생활에 가장 큰 박수를 보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 이춘광씨다. 이승엽은 3년 전 본지와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야구장을 찾는 게 가장 큰 취미다. 요즘 들어 '내 아들 자랑스럽다' '잘했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고 기뻐했다. 이씨는 "승엽이가 '후회하시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줘 정말 고맙다"고 했다.
 
이형석 기자 lee.hyeongseok@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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