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대훈(25)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몇 시간 전에 2017 월드 태권도 그랑프리 파이널 68kg급에서 최정상을 차지한 선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날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의 팔레 드 스포츠경기장에서 열린 2017 월드 태권도 그랑프리 파이널 68kg급 결승에서 알렉세이 데니센코(러시아)를 14-13으로 누르고 3연패(2015·2016년)를 달성했다. 2013년 월드 그랑프리 파이널이 처음 시작된 이래로 3연패 달성은 남녀 통틀어 이대훈이 처음이다.
월드 그랑프리 파이널은 그해 최고를 가리는 '왕중왕전' 격 대회다. 우승 이후 한숨 푹 자고 일어났다는 이대훈은 "우승 이후 동료들의 축하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3연패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서 "결승전 한판만 생각하고 시합에 집중했기 때문에 우승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기쁨도 두 배"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대훈은 2017 세계태권도연맹(WT) 갈라 어워즈에서 통산 세 번째 '올해의 남자 선수(2015·2016년)'로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2년간의 슬럼프를 딛고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각종 대회에서 금메달을 쓸어 담으며 한국 태권도의 '간판'으로 불린 그는 2015 첼랴빈스크(러시아) 세계선수권 8강 탈락에 이어 2016 리우 올림픽서도 8강 탈락 이후 패자부활전을 거쳐 간신히 3위에 올랐다. 2년 연속 메이저 대회에서 부진하자 일부 팬들은 '연약하다' '말랐다' '한물갔다'는 비난을 쏟아 냈다. 키 183cm의 호리호리한 체격을 비꼰 것이다.
선수 생활 최대 위기를 맞은 이대훈은 '포기' 대신 '업그레이드'를 택했다. 주로 발차기로 점수를 내는 태권도의 특성상 선수들은 타 투기 종목 선수들에 비해 상체 근력이 덜 발달한 편이다. 그가 택한 해법은 '턱걸이'였다. 약점으로 지적받은 상체의 힘을 키우기 위해 난생처음 턱걸이를 시작했다.
이대훈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다. 운동선수들은 턱걸이를 수십 개씩은 거뜬히 해낼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때 나는 턱걸이를 한 개도 못했다"고 털어놨다. 처음엔 무작정 매달렸다. 버틸 만해질 때쯤엔 시간을 조금씩 늘렸다. 팀 훈련이 끝나도 곧장 웨이트트레닝장으로 직행해 턱걸이로 상체 근력을 키웠다.
이대훈은 "훈련 중에 잠깐 쉬는 시간에도 10초씩 매달렸고, 훈련이 끝난 뒤에도 홀로 철봉과 씨름했다"며 "코치 선생님들이 '또 턱걸이 하니?' '지금은 몇 개나 하니' 등 내가 하는 턱걸이를 두고 농담이 생겨날 만큼 철봉에 붙어서 살았다"고 했다.
태권도 규칙이 변경되는 행운도 따랐다. WT는 적극적인 경기 운영을 유도하고자 몸싸움을 벌이는 상황에서 '손으로 미는 행위'를 허용했다. 상대를 밀어내거나 버틸 만큼 상체의 힘이 있으면 벌어진 공간을 파고들어 포인트를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대훈이 화려하게 귀환에 성공한 이유다. 이대훈은 "최근에는 한자리에서 턱걸이를 10회씩 5세트를 거뜬하게 한다"면서도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다음 목표는 내년 1월 역대 최다 상금(약 8000만원)이 걸린 신설 대회 그랜드슬램과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이다. 2010·2014년 아시안게임 우승자인 그는 내년 대회까지 우승하면 3연패를 이룬다. 이대훈은 "앞으로 출전하게 될 대회에선 좋은 성적만큼이나 더 빠르고 더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고 싶다. 태권도가 재미있는 스포츠라는 생각을 팬들에게 심어 주고 싶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