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장타자가 많다고 다득점을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다. 기동력이 필요하고, 각 타순에 필요한 역량을 갖추고 성향도 반영돼야 한다. 유의미한 데이터 확보가 수월한 시대다. 그러나 지도자의 직관도 큰 영향을 미친다. 시행착오를 통해 최적을 찾는다.
키움은 타선 대들보 박병호(33)의 고정 4번 타자 복귀를 4월 마지막 주에서야 결정했다. 빅리그에서도 추세로 자리 잡은 '강한 2번' 타자를 내세우려 했고, 순차적 변화를 위해 3번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 타순에서 타율 0.288·2홈런에 그쳤다. 장정석 키움 감독은 결국 오판을 인정했다. 4번으로 돌아온 박병호는 이후 제 페이스를 찾았다. 16경기에서 홈런 8개를 몰아쳤다.
장 감독은 "박병호가 마치 '나는 4번 타자다'라고 무언의 답변을 하는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공격력 증대를 위한 시도였지만 그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바로 변화를 줬다. 선수의 타격감이 올라올 시점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4번 복귀에 더 의미를 부여했다. 상징적인 자리에 적합한 선수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습이다.
다수 선수가 "타순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한다. 올 시즌, 1번에서 3번으로 나서는 kt 주축 강백호(20), 부상 전 강한 2번 실현의 중심이던 NC 나성범(30)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임무가 있다. 수행하기 위해서는 의식할 요인도 늘어난다. 득점 기회를 여는 것과 해결하는 것은 자세부터 다르다. 경험·기량이 검증된 선수도 마찬가지다.
개인 성향도 반영돼야 한다. kt 박경수(35)는 하위 타순을 선호한다. 그는 "집중력 유지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공격형 테이블 세터 구성을 원했던 이강철 kt 감독은 시즌 초반 그를 1·2번에 배치했다. 그러나 선수의 의사를 고려해 6번으로 돌렸다. 최근에는 주로 5번으로 나선다. 장타력이 있는 타자기 때문이다. 전력과 개인 성향을 두루 고려했다. 일종의 타협이다.
어떤 타순에 나서도 제 몫을 해내는 선수도 있다. 롯데 손아섭과 전준우는 시즌 단위로 번갈아 리드오프와 3번을 맡았고 이름값에 걸맞은 성적을 남겼다.
이런 선수의 타순 변화는 대체로 컨디션 관리 차원이다. 두 선수 모두 올 시즌 한 차례씩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양상문 롯데 감독은 가장 익숙한 자리,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자리에 두루 포진시키며 반등을 유도했다.
이 상황에서는 변화를 맞이한 선수의 심리 관리가 필요하다. 자존심을 지켜 주는 선에서 타순을 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동료의 지원도 필요하다. 제 자리를 내준 선수가 부담을 털고 타격감 회복에 나서기 위해서는 난 자리가 두드러지지 않아야 한다. 손아섭과 전준우는 현재 회복세다.
때로는 변화를 주지 않는 게 통한다. kt 멜 로하스 주니어는 타격, 해결사 능력 모두 떨어졌다. 슬로우스타터로 알려졌지만 우려가 컸다. 팀 부진으로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이강철 감독은 타순 변화를 주지 않았다. 수비 집중력을 다그쳤을 뿐이다. "팀에 미안했다"던 로하스는 5월 출전한 11경기에서 타율 0.390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