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루기(LOOGY)'라는 게 있다. '레프티 원-아웃 가이(Lefty One-Out Guy)'를 줄여 표현한 것으로 쉽게 말해 왼손 스페셜리스트다. 일반적으로 경기 중후반 상대 왼손 강타자를 막아내기 위해 투입되는 왼손 투수를 칭한다. 이들은 대부분 왼손 타자만 상대하고 바로 교체된다. KBO 리그에선 과거 류택현, 이상열, 가득염이 대표적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올해 LA 다저스에서 뛴 아담 콜라렉을 비롯해 랜드 쵸트, 마이크 마이어스 같은 선수들이 전형적인 '루기'다.
하지만 당장 내년부터 미국에선 '루기'가 줄어들 전망이다. 이유는 규정 변화다. 경기당 평균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투수가 교체되면 최소 3타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규정을 신설해 적용을 예고했다. 단 아웃카운트와 상관없이 이닝을 종료하거나 부상을 당한 경우는 예외로 교체가 바로 가능하다. 이 새로운 규정이 첫 시행되는 2020시즌 어떤 영향과 전략상 변화가 나타날까. 예상대로 메이저리그 대다수의 왼손 투수들은 강한 반대 의사를 표출했다. 라이언 벅터(오클랜드)는 두 살짜리 딸 사진과 함께 '당신들은 이 아이의 입에서 음식을 빼앗았다'라는 메시지를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보냈다.
'루기'의 시작은 1980년대 후반 당시 토니 라루사 오클랜드 감독이 릭 허니컷 전 LA 다저스 투수코치를 이런 형태로 활용하면서 소개됐다. 처음에는 한정된 불펜 투수를 한 두 타자만 상대하고 뺀다는 것 자체에 대해 '인력 소모'라는 비난이 따랐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 아웃카운트 하나가 경기 승패에 영향을 끼치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면서 다른 팀에서 차용해 지난 30여 년 동안 불펜 분업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전략으로 활용돼왔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이런 분위기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당장 제도 도입 발표가 나왔을 때 시카고 컵스에서 LA 에인절스로 사령탑 자리를 바꾼 조 매든 감독이 '야구 전략에 영향을 주는 규정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예를 들어 마운드에 올라간 불펜 투수가 노아웃 상황에서 컨트롤 난조에 시달리며 볼넷을 남발하는 장면을 가정해보자. 갑자기 점수 차가 벌어지기 시작해 빅이닝을 허용하면 당연히 경기 시간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요즘 같은 홈런 시대에 백투백 홈런을 내주고 마운드에서 버틸 의욕이 완전히 사라진 투수를 새 규정에선 바꿀 수 없다. 결국 그날 어느 투수가 됐건 연결고리 중 하나만 흔들리면 경기 자체가 일방적인 흐름으로 흘러 팬들의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불펜 투수들의 투구수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룰 개정에 따라 주자를 여러 명 내보내면 투구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다음 경기 불펜 운영에 영향을 줄 것이다. 특히 매 경기를 최종전처럼 치르는 포스트시즌을 생각하면 어느 팀이건 악몽 속에서 헤매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특히 최근 메이저리그 불펜 투수들의 경기당 평균 상대 타자수가 3타자에 못 미치고 있어서 규정 변화 하나로도 감독들은 전략과 전술 변화를 적지 않게 시도해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이기에 구단과 감독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야 한다. 162경기로 치러지는 페넌트레이스에서 불펜 운영이 헝클어지면 애초에 기대됐던 팀 성적과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울 수 있다. '이 규정은 경기 시간 이슈가 아니라 경기 상황의 변화'라고 말한 제리 블레빈스(전 애틀랜타)의 얘기가 귓가에 자꾸 맴도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