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직구는 가장 원초적인 구종이다. 투구의 기본으로 꼽힌다. 투수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던지는 공이다. 최동원, 선동열부터 구창모, 안우진까지 리그 에이스는 대부분 강속구를 구사했다. 변화구는 그다음 옵션이다. 특히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들은 변화구를 '손장난'이라고 표현하며 경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직구의 의미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지난 2014년 KBO리그 직구 구사율은 59.2%(스탯티즈 기준)에 달했다. 2015년과 2016년에는 50% 안팎으로 줄었고, 이후 리그 직구 구사율은 꾸준히 40%대에 머물렀다. 이런 추세 속에 올 시즌 리그 직구 구사율은 단 42.5%(11일 기준)에 불과하다.
주목할 건 직구보다 변화구를 더 많이 던지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 투수들이다. KBO리그 평균자책점 선두(1.65)를 달리고 있는 김광현(SSG 랜더스)이 대표적이다. 올 시즌 김광현의 직구 구사율은 단 28.3%에 불과하다. 반면 김광현의 장기인 고속 슬라이더 구사율은 40.1%에 달한다. 고영표(KT 위즈)는 사이드암스로 투수답게 직구(포심 패스트볼) 대신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지만, 그 역시 1구종은 빠른 공이 아니라 체인지업(구사율 47.6%)이다.
구사율 변화는 불펜에서도 확인됐다. KT 셋업맨 주권은 직구 구사율이 29.4%에 불과하다. 체인지업을 63.7%나 던진다. 장지훈(SSG)도 직구(33.5%)가 아니라 체인지업(42.3%) 비중이 가장 높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서동민(SSG)이다. 그는 지난 2014년 입단 후 긴 무명 생활 끝에 지난 2020년에야 1군 마운드를 처음 밟았다. 작년까지 추격조 역할에 그쳤지만, 올 시즌에는 17경기 평균자책점 1.04, 홀드 4개를 기록하며 필승조로 떠올랐다. 구위도 구종도 평범하지만, 구사율이 특별하다. 그는 직구를 단 21.5%만 던진다. 슬라이더 구사율은 76.4%(리그 1위)에 달한다.
변화구의 시대가 온 건 미국 메이저리그(MLB) 추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미국 디애슬레틱의 이노 새리스는 “우리가 아는 야구에서 투수는 제구가 잘 된 패스트볼을 통해 볼카운트를 선점하고, 스트라이크존 밖으로 유인구(변화구)를 던져 삼진을 잡았다. 이제 더 이상은 아니다. 볼이 스트라이크보다 많은 상황에서 투수의 패스트볼 비율은 2012년(64.9%)과 달리 55%까지 떨어졌다. 변화구 비율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으며 모든 카운트에서 패스트볼 비율이 내려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제 KBO리그 투수들도 직구가 기본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있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공을 가장 많이 던지고 있다. 김태한 KT 투수 코치는 "선수가 잘 던지는 구종, 효과적으로 타자를 유인하는 구종을 더 던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광현이 직구를 줄인 것도 변화구를 던진 결과가 더 좋기 때문이다. MLB 진출 전인 2019년 직구(피안타율 0.342) 구사에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한국 복귀 후 직구 구사율을 10%포인트 이상 줄였다. 김광현의 직구 스피드는 여전히 시속 140㎞ 중반을 넘지만, 피안타율(0.302)이 높자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에 그 자리를 양보했다. 조웅천 SSG 투수 코치는 "김광현은 올해 우타자를 상대할 때 체인지업과 커브 활용도를 높였다. 변화구의 완성도가 높아져 그렇게 했고, 결과도 계속 잘 나오고 있다. 본인도 더 변화구에 자신감을 갖고 투구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이유는 변화구가 직구보다 효용이 낫기 때문이다. KBO리그 A구단의 한 전력 분석원은 “직구는 기본적으로 변화구의 효율을 따라갈 수 없다. 타자들이 보통 직구를 노리고 타석에 들어서기 때문"이라며 "변화구 비율을 아무리 높이더라도 직구를 20% 이상 던진다면 타자는 직구를 노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미 통산 1865안타를 기록한 추신수(SSG)도 최근 인터뷰에서 "난 항상 직구를 노리고 타석에 선다. 빠른 공을 노리다가 변화구는 칠 수 있지만, 변화구를 노리다가 직구를 치긴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나 변화구를 1구종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변화구를 언제든 스트라이크로 꽂아 넣을 수 있는 투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을 일으키려면, 제구가 돼야 한다. 서동민은 슬라이더를 주 무기로 삼은 이유를 "어떤 카운트에서든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A구단 분석원은 이를 두고 "리그에 변화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는 투수가 드물다. 슬라이더가 스트라이크로 들어가니까 쓸 수 있는 전략"이라고 했다. B구단 분석원도 “직구의 가장 큰 장점은 구속이 아니라 제구하기 쉽다는 것”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