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과 10일, 도쿄의 밤은 쓸쓸했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이 ‘약체’ 호주에 이어 ‘숙적’ 일본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호주를 상대로도 자신 있게 경기를 풀어내지 못했다. 일본전에서는 부담감에 짓눌려 자멸하고 말았다.
한국은 두 경기 17이닝 동안 21자책점 팀 평균자책점이 11.12를 기록했다. 현재 1라운드를 진행 중인 A, B조 10개 나라 중 꼴찌다. 실점만 많이 한 게 아니라 과정도 좋지 않았다. 볼넷이 너무 많았고, 볼과 스트라이크의 차이가 관중석에서도 크게 보였다.
특히 일본전 다섯 번째 투수로 나온 김윤식은 세 타자를 상대하면서 사사구만 3개를 주고 강판했다. 9번째 투수 이의리도 네 타자와 대결하는 동안 볼넷을 3개나 줬다. 거듭된 졸전을 두고 현장에선 “한국 투수들의 자신감이 왜 저리 떨어졌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강철 감독이 대표팀 관리에서 특히 신경 쓴 게 멘털 관리였다. KBO리그 최고의 선수, 그리고 메이저리그(MLB) 스타 김하성과 토미 에드먼까지 데려왔으니 케미스트리만 관리하면 좋은 전력을 보여줄 거로 기대한 것 같다. 호주를 상대로 방심하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했다.
이강철 감독은 10일 일본전에 앞서 “(호주전 패배 후) '기죽지 말고, 우울해하지도 말고, 특히 자책하지 말자. 앞으로 경기 더 남았으니까 한 경기 한 경기 잘해 나가자'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전했다. 위기일 때 굳이 선수들에게 부담감을 얹어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감독은 “다들 (감독의 뜻을) 알아들었을 거다. 주장(김현수)이 오늘 경기 전에 단체 미팅하는 걸 봤다. 일부러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내용은 알아보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선수들, 특히 투수들은 마운드에서 마치 얼어붙은 거 같았다. 일본전에서 10명의 투수가 등판해 총 투구수 186개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과감하고 정확한 공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거나, 안타를 맞을까봐 달아나는 피칭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현상은 호주전보다 일본전에서, 경기 초반보다 후반에 더 많이 나왔다. 중요한 순간일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는 의미다.
자신감은 단지 심리 상태가 아니다. 자신감은 실력에서 나온다. 자신의 무능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실수가 나오고 무리수를 던지는 것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동료를 신뢰하지 못할 때 스스로 위축되는 것이다.
한국야구의 위기론은 10년 전부터 꾸준히 나왔다. 특히 투수들의 기량, 특히 제구력 저하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됐다. 이때마다 반대 논리가 등장했다. “더 빠른 공을 던지는 게 중요하다.” “대신 투수가 구사하는 구종이 많아졌지 않느냐.” “스트라이크 존이 좁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들이 투수들을 자만에 빠뜨렸다. 그런 투수들도 귀해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으면 수십 억원의 계약에 성공한다. 절대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국제 경쟁력과 상관없이 내수 시장에서 상대적 우위를 가진 것만으로 그들은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누렸다. 그러나 그들이 국제 무대에 나오자 진짜 실력이 여실히 입증됐다.
이번 WBC B조에서 체코와 호주의 선전이 눈에 띈다. 다른 조에서도 ‘야구의 평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대표팀은 제대로 프로리그도 갖추지 못한 팀들조차 당해내지 못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겨야 할 상대에게 끌려가고, 꼭 이기고 싶은 상대에게 벌벌 떠는 건 다른 복잡한 이유가 아니다. 실력 부족 때문이다. 그 냉혹한 현실을 2023 WBC에서 확인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