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개막 전 두산 베어스의 유격수 포지션은 '무주공산'에 가까웠다. 수년간 주전으로 활약한 김재호(38)의 적지 않은 나이를 고려하면 세대교체 필요성이 강조됐다. 실제 안재석(21) 이유찬(25)을 비롯한 젊은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 치열한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승엽 두산 감독이 고심 끝에 선택한 개막전 주전 유격수도 김재호가 아닌 이유찬이었다. 이 감독은 "이유찬은 수비가 좋고 어깨도 강하다. 경험이 쌓이면 좋은 선수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기대와 달리 이유찬은 아직 주전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이승엽 감독은 이유찬에 안재석, 전민재(24) 등을 두루 테스트하며 유격수 발굴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상황이 마뜩잖다. 그 결과 우선순위에서 밀려있던 김재호의 출전 횟수가 부쩍 늘었다. 지난 25일부터 3경기 연속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제자리걸음 하는 후배들과 달리 존재감이 바로 드러난다. 지난달 25일 삼성 라이온즈와 홈 경기에선 3-3으로 맞선 연장 11회 말 2사 만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때려냈다. 시즌 타율이 2할대 초반에 머물지만, 득점권 타율은 0.667(6타수 4안타)에 이른다. 경험에서 나오는 매끄러운 수비도 아직 쏠쏠하다.
그렇다고 마냥 '김재호 카드'를 밀고 갈 순 없다. 워낙 잔 부상이 많은 데다 체력 안배 차원에서 휴식도 필요하다. 이승엽 감독은 지난달 30일 창원 NC 다이노스전에 앞서 김재호의 선발 출전 배경을 설명하며 "베테랑이다 보니까 매 경기를 100% 컨디션으로 가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한다. 한두 경기 나가면서 조금 힘에 부친다고 판단되면 (주전 유격수가) 바뀔 수 있는 거다. 조금 더 봐야 할 거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젊은 선수들이 그 자리(유격수)를 욕심냈으면 좋겠다. 그 정도 목표 의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강한 메시지를 전했다.
사실 '포스트 김재호'를 누구보다 기다리는 건 김재호다. 그는 지난 4월 "(안)재석이와 (이)유찬이가 경기에 꾸준히 나서고 있는데, 그들에게 경험을 통한 조언을 하고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것도 내 역할 중 하나"라고 몸을 낮췄다. 그런데 어느 후배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돌고 돌아서 두산 주전 유격수를 김재호가 맡으니, 감독도 선수도 답답할 노릇이다. 5위 경쟁이 워낙 타이트해서 특정 선수를 계속 '실험'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이승엽 감독이 생각하는 1군의 벽은 높다. 이 감독은 "여긴(1군) 테스트하는 곳이 아니라 결과를 보여주고 이겨야 하는 곳"이라면서 "스프링캠프나 시범경기면 이 선수 저 선수 돌려서 쓸 수 있지만, 지금은 좋은 선수를 써야 하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대응이 안 된다고 판단하면 다른 선수를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누군가 경쟁력을 입증하고 기회를 잡아야 한다. 지난달 31일 NC전에서 선발 유격수로 나서 결승 홈런을 때려낸 박계범은 "우리 팀에서 수비 경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