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구르미 그린 달빛' 최고의 발견이다. '구르미 그린 달빛'에 푹 빠져있던 시청자라면 기억하지 못할래야 못 할 수 없는 '중전' 한수연(34)이다.
시청률 20%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하면서 드라마의 인기는 매 회 수직 상승, 주연 뿐만 아니라 조연들까지 주목 받았다. 그 중 표독스러운 악녀 캐릭터로 단숨에 눈도장을 찍은 한수연은 '로또'나 다름없는 기회를 잡았고 굴러 들어온 복을 놓치지 않았다.
오디션을 통해 스스로 따낸 배역이기에 더욱 감사한 반응이다. 방영내내 호평이 쏟아졌지만 정작 한수연은 촬영내내 근심과 고민을 달고 살아야 했다. 욕심이 났기에 더 잘하고 싶었지만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았던 시간. 큰 캐릭터가 너무 작은 배우를 만나 빛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자책했고, 혹여 사약을 받고 중도 하차하게 될까 노심초사 했다.
데뷔 10년 만에 대중이 인정하는 대표작과 인생 캐릭터를 품게 된 소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기쁘지만 무명 10년의 짬은 아직 살아있다. 영원할 수 없는 관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고 때문에 작품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도 할 수 없다. "끊임없는 노력만이 살 길"이라는 한수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진중함과 신중함 그리고 묵직함이 모두 담겨 있었다.
연기를 포기하고 국수집을 차릴까 진지하게 고민한 순간도 있었지만 때마다 일거리가 주어졌고 결국 10년을 이어왔다. 그 사이 내공과 노련미가 쌓였지만 '구르미 그린 달빛'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당시 촬영 중이었던 영화 '더킹'의 주연 정우성·조인성에게 구구절절 자랑할 정도의 순수함도 여전하다.
헝가리에 살았던 9년의 시간동안 매일 영화를 챙겨 보면서 영화광이 됐고 여배우라는 꿈을 키웠다. 욕심을 내기 보다는 좋은 작품, 좋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1순위라는 한수연. 타고난 매력은 결코 숨겨질 수 없다. 만인의 관심을 받아도 충분한, 멋진 배우의 발견이다.
※인터뷰 ③에서 이어집니다.
- 데뷔 10년차가 됐다. 배우라면 누구나 인생작·대표작을 꿈꿀텐데.
"작품도 운이고 인연이긴 한데 들어온다고 해서 아무 연기나 하고 싶지는 않다. 다양한 도전을 좋지만 나중에 봤을 때 내 필모그래피에 내가 후회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데뷔 초 생계형 배우로 생활했을 때도 돈은 없지만 무조건 하고 싶은 작품만 했다."
- 좋은 작품·하고 싶은 작품의 기준은 무엇인가.
"내 마음이 동하고 그게 원동력이 돼 좋은 연기를 끌어주는 작품. 생계는 아르바이트나 다른 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너와 나의 21세기'를 내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도 나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겹치기 알바에 힘들어 하는 88만원 세대 이야기인데 깊이 공감했다."
- '구르미 그린 달빛'을 통해 많은 작품이 한수연을 찾지 않을까.
"드라마 '일말의 순정'이 끝났을 때 이재룡 선배님께서 '너는 이제 작품 끊길 걱정은 없겠다'는 덕담을 해 주셨다. 그 때 굉장히 작은 역할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주인공처럼 비중이 커졌다. 선배님 말씀처럼 나 역시 꽤 기대를 했는데 현실은 다르더라."
- 실망이 컸을 것 같다.
"기대하면 그 만큼 더 상처받고 좌절하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상처를 좀 많이 받았다. 강수연 선배님께서 '배우는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직업이다'고 말씀하신 것을 봤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이 만큼 했으니까 앞으로 조금 더 편해질거야'라는 생각은 오산이고 오만이고 착각이다.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 그래도 점점 연기와 작품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 않나.
"힘들긴 하다. 지금은 '구르미 그린 달빛' 인기에 묻혀가고 있지만 나에게 따로 작품이 들어올지는 미지수다. 여전히 오디션을 봐야 하고 '합격하지 못하면 쉬겠구나'라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꽁꽁 다져진 마음이 풀리는 순간 또 상처를 받을 것 같다. 물론 욕심은 있다. 작품성·대중성을 다 갖춘 작품을 만나고 싶다."
- 악역으로 빛을 봤으니 당분간은 악역 캐릭터가 많이 들어올 것 같다.
"주변에서 두 번 정도는 더 해도 된다고 하더라.(웃음) 이번에는 사극이었으니까 현대극에서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충분히 해 볼만 한 것 같다."
-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나.
"20대 때는 괜찮았는데 30대가 넘으니까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나만 이 일을 사랑하고 나만 연기를 사랑하지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네. 좋은 쓰임을 못 받고 있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볼까?'라는 고민이 생기더라. 근데 막연하게 생각만 할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진지하게 '국수집을 차려볼까' 계획했던 적은 있다."
- 요리를 잘하는 편인가?
"국수만 잘 만든다.(웃음) 내가 만든 요리 중에 사람들이 먹으면 다 맛있다고 하는 요리가 국수다. 비빔국수에 주먹밥, 고기 한 점을 세트로 점심 메뉴만 팔아볼까 생각했다. 야채도 유기농 야채만 써서. 결국 생각으로 끝났다."
- 연기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연기 빼고는 길이 없다. 그리고 정말 놓고 싶을 때마다 좋은 작품이 들어왔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일을 놓지 말라는 건가' 싶기도 했다. 시련이 오는 것도 더 절박할 때 찾아오는 기회를 감사하게 받아들이라는 것 같다. 나를 준비 시키는 느낌이다. 이 정도 좋은 사람이 돼야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긍정적으로 낙천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 휴식기에는 뭘 하는 편인가.
"잘하는 것은 많은데 취미가 없다. 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한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자연 속에서 오래 걷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 끝이다. 그게 최고의 휴식인 것 같다. 점점 게을러지는 것 같기도 하고.(웃음)"
- 연애 사업은?
"진짜 못한다. 남자한테는 잘 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한 연애다. 다 퍼준다. 밀당도 못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다 보니까 조금만 흠이 보이면 남편·사위·아이 아빠감으로 아니라는 생각부터 든다. 지금 엄마랑 둘이 살고 있는데 이게 편하다."
- 평소 좋아하는 작품 스타일이 있나.
"어렸을 때 헝가리에서 9년 정도 살았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처음엔 헝가리 아이들과 친하지 못했으니까 주 일과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어떤 영화는 너무 어려운데 또 어떤 영화는 굉장히 좋은 감성을 담고 있다. 그럴 땐 보석을 캐내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럽영화 감성을 좋아한다.
그리고 영화를 볼 때 습관이 영 아니다 싶은 것은 아예 시작도 안 한다. 만든 사람은 얼마나 공들여 만든 작품이겠냐. 허투루 보기는 싫고 스킵해서 보는 것은 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와 맞는 스타일만 찾아 보려고 한다."
- 배우로서 꼭 한 번 연기해 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영화로 따지면 김꽃비 씨가 나온 '거짓말'도 좋고 최근 '최악의 하루'에서 한예리 씨가 연기한 캐릭터도 재미있었다. 여성 영화가 많이 없으니까 종종 등장하는 여성 영화에 눈길이 간다. 무엇보다 난 작품이 좋으면 캐릭터도 분명 좋다고 생각한다. 잘 나온 시나리오가 있으면 톱 배우들도 비중 상관없이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나. 나도 매력적인 시나리오, 끌리는 시나리오가 있으면 장르 상관없이, 캐릭터 상관없이 하고 싶다. '밀정'도 그 중 한 작품이었다."
-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작은 역할이었지만 무조건 출연하고 싶었다. 사실 우리 집 안에서는 좀 큰 일이었다. 외증조 할아버지가 독립군이다. 공주에서 의병대장으로 활동 하셨다. 엄마에게 '이런 역할이 들어왔어'라고 말했더니 '할 수 있으면 무조건 해. 자부심을 갖고 해야 돼'라면서 응원해 주시더라. 내가 맡았던 매향이라는 캐릭터도 독립군이었는데 상당 부분 편집이 됐다. 아쉽지만 참여했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