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풍운아', 이원국을 아시나요?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인 1983년. 서울 연고의 MBC 청룡은 오른손 투수 이원국을 영입했다.
당시 선수 나이론 환갑인 34세. 하지만 트리플A급인 멕시칸리그를 주름잡았던 투수였다. 더블A 출신 박철순은 전해 24승을 거두며 야구 팬에게 '프로야구'가 무엇인지를 알렸다.
하지만 1983년 이원국은 고작 8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친다. 1승 1패 평균자책점 4.42가 이원국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남긴 기록 전부다.
하지만 '이원국'이라는 이름은 가볍지 않다. 그는 1960년대부터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야구를 한 원조 '풍운아'였다.
이원국은 1965년 황금사자기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2학년 에이스로 모교 중앙고에 해방 이후 첫 우승을 안겼다. 10월 20일 부산고를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는 삼진 17개를 뽑아내며 1안타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원국과 동기로 당시 유격수로 뛰었던 이광환 한국야구위원회(KBO) 육성위원장은 “고교 시절 이원국은 강속구를 앞세운 투수였다. 스피드건은 없었지만 직구 스피드는 시속 150km 는 너끈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변화구로는 커브와 슬라이더를 던졌다.
이원국은 중앙고 3학년이던 1966년 3월 일본 프로야구 도쿄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했다. 구단주이던 나가노 마시이치 다이에이영화사 사장이 그해 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 참가 도중 이원국의 투구에 반했다고 한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2군을 전전했고, 1군에서는 1967년 한 경기에 등판하는 데 그쳤다.
이 경기에서 이원국은 1⅓이닝 동안 타자 7명을 맞아 2안타 볼넷 1개로 2실점했다. 1968년에는 외국인 선수 정원 제한에 걸려 ‘야구 연수’라는 명목으로 시카고 컵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다. 이듬해 도쿄 오리온스가 롯데로 매각되자 그대로 미국에 정착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미국야구학회(SABR) 회원인 프리랜서 야구작가 메리트 클립턴은 “이원국이라는 투수가 스프링캠프에서 오른손과 왼손으로 모두 피칭을 하는 스위치 피처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곧 원래의 오른손 피칭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이 위원장은 “고교 시절에는 한 번도 양손 투구를 한 기억이 없다. 아마 뭔가 와전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국은 이후 몬트리올 엑스포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을 옮겨 다녔다. 트리플A까지는 승격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메이저리그 진입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1972년 5월부터 ‘에르네스토 카를로스’라는 이름으로 멕시칸리그에서 뛰었다.
소속 팀은 사비나스, 살티요, 코아우일라, 몬클로바, 포사리카 등이었다. 멕시칸리그는 1955년 마이너리그 더블A급으로 편성됐지만 이원국이 뛰던 당시에는 트리플A급이었다.
멕시칸리그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원국의 통산 성적은 149승 128패 탈삼진 1,126개, 완투 154회, 완봉 33회다. 통산 방어율은 2.81로 멕시칸리그 역대 2위에 올랐다. 1979년에는 37경기에 등판해 무려 277이닝을 던지며 19승 14패 방어율 2.53을 기록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그해 이원국은 마이너리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공을 던진 투수였다. 270이닝 투구는 1970년대 마이너리그에서 여섯 번 밖에 나오지 않은 기록이다. 윈터리그인 멕시칸퍼시픽리그에서는 5시즌 동안 통산 16승 23패 방어율 2.97 탈삼진 161개를 기록했다.
이원국은 1983년 3월 18일 국내로 복귀해 MBC와 계약금 4천만 원, 연봉 3천만 원에 계약했다. 하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당시 OB 코치였던 이 위원장은 "김동엽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이 맞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MBC 선수였던 김용달 KBO 육성위원은 "이미 전성기가 지나 있었다. 제구와 구위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원국은 1984년 오른쪽 팔꿈치 부상 등 이유로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하고 결국 시즌 뒤 임의탈퇴선수로 은퇴했다. 은퇴 뒤에는 멕시코로 돌아가 전 소속팀인 사비나스의 단장으로 2년 동안 활약했고 그 뒤 미국 텍사스주에서 건축 사업을 했다. 이후 하와이에 거주했다. 아버지 이준용씨도 1920년대 중앙고보(현 중앙고)에서 야구 선수로 뛰었다.
최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