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희생번트는 다른 종목에는 없는 '팀을 위한 플레이'다. 아웃 카운트 하나를 소비한다는 의미보다 주자를 안전하게 진루시키는 것에 의의를 두는 작전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 작전이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최근 프로야구에선 '두산의 번트 작전'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두산은 25일 현재 62개의 희생번트를 성공시켰다. 9개 구단 가운데 SK(74회)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김진욱 감독 시절인 지난해에는 82개의 희생번트를 성공해 리그 4위에 올랐다. 숫자만 따지면 올해도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수치가 아닌 '두산'이라는 팀이 가진 컬러 때문이다. 두산은 그동안 '발야구', '육상부', '강공' 등의 단어와 어울리는 선이 굵은 야구를 구사했다. 타자들 개개인이 '치고 달리는 것'에 능했고, 팀 이름 앞에는 '허슬두'라는 애칭이 따라다녔다.
정수근 베이스볼긱 위원이 최근 불거진 송일수 감독의 번트 논란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이번 번트 논란이 희생번트라는 고유의 개념을 격하시키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논란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최근 두산의 번트 작전을 두고 말이 많다. 송일수 감독은 "솔직히 기분이 나쁘다. 번트 작전도 야구의 일부"라며 불쾌감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지금 두산의 번트 작전에 대해 말이 나오는 것은 희생번트라는 고유의 개념을 격하시켜서 '왜 번트를 많이 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번트가 가장 많은) 이만수 SK 감독을 향해서도 번트 논란이 있어야 했다. 문제는 '두산'이라는 팀이 가진 컬러, 이미지와 번트 작전이 맞지 않을 뿐더러 번트를 대는 상황 자체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는 것이다. 번트 논란에 대한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본질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현재 두산 타선은 번트 없이도 충분히 진루타가 가능하다. 선발 라인업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9명의 타자 중 5~6명이 3할대 타자다. 그만큼 공격 루트가 다양한 팀이라는 것이다. 특히 민병헌을 비롯해 오재원, 정수빈, 허경민, 김재호 등은 발이 빨라 단독 도루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이 1루에 있을 때에도 번트 작전은 자주 나온다. 그래서인지 두산 특유의 '발야구'가 올해는 사라진 느낌이다.(두산은 올 시즌 팀 도루 85개로 6위에 올라 있다. 지난해 172개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두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치고 달리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육상부', '허슬두'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때문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산의 이미지와 잦은 번트 작전이 물과 기름처럼 융화가 안 되는 것이다."
- 박빙 상황에서는 1점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1루에 주자가 있을 때 번트를 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으로도 여겨지는데.
"물론 경기 후반에, 예를 들어 9회 0-0이거나 1점 차 근소한 상황에서 뒤지거나 앞서 있을 때 번트를 댄다. 그건 좋다.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1점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초반부터 무리해서 번트를 대는 것은 아쉽다. 지난 1일 대전 한화전에서 상대 투수 타투스코가 제구가 흔들리면서 3회 타자를 볼넷과 몸에 맞는 볼로 내보냈다. 두산은 무사 1·2루 찬스를 잡았고, 타석에 팀 내 타율 1위를 자랑하는 민병헌이 들어섰음에도 송 감독은 번트를 지시했다. 민병헌이 진루타에 성공하긴 했지만, 강공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경기에서 두산은 후반에 대량 실점을 하면서 역전패를 당했다는 점이다. 올해 두산의 마운드는 1점을 뽑아 이길 수 있는 무게감이 아니다. 초반에 상대를 두들겨 최대한 많은 점수를 뽑아야만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두산이 지난 5월 상승세를 탔던 것도 마운드가 4점 내주면, 타선이 5점 뽑아서 이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아닌가. 경기 초반 번트 작전이 올해 두산의 사정과는 맞지 않다."
- 송일수 감독은 "주자가 뛰기 힘든 투수가 마운드에 있으면 번트를 해서 진루타를 만들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뛰기 힘든 투수들이 있을 때 득점 상황에서 번트를 대는 것은 물론 이해한다. 그런데 뛰기 힘들다고 판단하면 무조건 번트를 대야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홈런이나 안타가 나올 확률도 충분히 있다. 두산이라면 더욱 그렇다."
- 벤치에서 번트 사인이 나왔는데, 선수들이 자신의 판단으로 안 대는 경우도 있나.
"야구는 팀 플레이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 다만 번트에 실패하게 되면 선수는 '억울하게 아웃 카운트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억울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번트가 아니어도 충분히 점수를 낼 수 있는데, 왜 번트를 대라고 했을까'라는 생각에 대한 것이다. 사실 두산의 경우 선수들 스스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좋다. 실례로 정수빈의 경우 올해 20개의 희생번트를 성공시켰는데, 본인이 타석에 들어서서 '내가 이 투수 공에 자신이 없다. 지금은 강공보다는 번트가 났다' 싶으면 스스로 결정해서 번트를 댄다. 굳이 벤치에서 자주 번트 사인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결국 작전의 성공 유무는 감독의 책임 아닌가.
"맞다. 뭐든 야구는 결과론이다. 감독도 결과로 자신의 야구가 맞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그럼 그게 송일수 감독만의 야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