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아이돌들이 쓰러지고 있다. 유명 아이돌 가수들이 몇달 사이 연달아 극단적 선택을 했고, 유명 걸그룹 멤버 등도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호소했다. 악플과 포털 사이트의 댓글, 개개인의 정신건강 문제가 부각됐다. 근본적으로는 연예산업 구조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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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생 때부터 빚 쌓이기도
2018년 아이돌 및 연습생 10여명을 심층 인터뷰해 책『아이돌 연습생의 땀과 눈물』을 쓴 이종임 문화사회연구소 이사는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길 원하는 건 주로 10대 청소년ㆍ아동이다. 하지만 데뷔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보호 장치는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들의) 학습권과 수면권은 지켜지지 않았다.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니 친구도 없고 선생님과 대화한 적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에게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도 ”전세계 어디를 봐도 한국과 같은 연습생 시스템은 찾아볼 수 없다“며 ”해외에서도 수차례 이 같은 시스템을 도입하려 했지만 10년에 달하는 전속계약을 하거나, 학교에 가 공부할 나이에 회사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이 서구적 틀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표한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연습생의 나이는 갈수록 어려지는 추세다. 기획사에 소속된 연습생 중 만 13~18세는 2014년 314명에서 2016년 647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반면 만 20세 이상 연습생은 같은 기간 동안 853명에서 775명으로 감소했다.
이들은 연습생 때부터 빚을 쌓기도 했다. 이 이사는 “보컬ㆍ댄스ㆍ연기 학원에 지출하는 비용도 많고, 학원형 기획사 등록비나 합숙 비용이 빚으로 쌓이는 경우도 보편적으로 나타났다”며 “다이어트나 성형 등을 일상적으로 권유하기도 했다. 심리적으로 경쟁압박이 대부분 심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기획사 차원에서 연습생들의 휴대전화를 검사하거나 일과를 폐쇄회로(CC)TV를 통해 감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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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문화산업 필수품 된 아이돌
정 평론가는 “80년대까지는 가요계에서 가수는 매니저와 개별적으로 활동했는데 90년대에 기획사가 생겨나며 가수를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며 “이는 철저히 한국적인 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다수를 희생하고 소수 엘리트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몰아주는 구조였다”고 지적했다.
기획사간 경쟁도 세졌다. 이 이사는 “대형 기획사 중심의 오디션과 아이돌 육성 방식이 자리를 잡게 되며 대부분의 기획사가 아이돌 가수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이돌 멤버들의 활동 시간을 스케줄 중심으로 촘촘히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장 평론가는 "기획사들 간 경쟁이 치열해졌고, 오디션 프로그램 조작 역시 다른 방법으로 경쟁에서 이길 방법을 찾지 못한 기획사들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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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문화산업 종사 노동자"
이 이사는 “연예기획사와 아이돌 가수는 방송이나 언론 보도에서 ‘가족 같은 관계’나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낸 친구‘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이들은 계약서를 기준으로 연습과 데뷔, 이후 활동이 이루어지는 엄연한 노동자”라며 “이들이 계약 관계에 있을 뿐이라는 걸 연예인 스스로나 일반 소비자들에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노무법인 유엔의 김성중 노무사는 “아이돌 가수 역시 ’수입에 의해 생활하는 자‘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될 수 있다”면서도 “다만 ’사용자의 지휘ㆍ감독을 받으며 임금을 받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기준에는 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회사에 종속된 상태로 회사의 지휘ㆍ감독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유명세 등으로 회사와 대등한 협상력을 가지는 경우 근로자로 인정받기 어려울 수 있다. 김 노무사는 “아이돌 연습생도 한 기획사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회사가 시킨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경우 노조법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며 “하지만 수입이 없거나 돈을 오히려 내는 경우 일종의 교육 과정으로 여겨져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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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 계약 제동 건 표준계약서
2009년 공정거래위원회는 배우 장자연이 폭행과 성상납 등에 시달렸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사건을 계기로 연예인들을 위한 표준전속계약서를 만들었다. 법무법인 세종의 임상혁(50·사법연수원 32기)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공정위가 만든 표준계약서가 많이 쓰이고 있다. 2009년 그룹 동방신기가 소속사와 전속계약 문제로 법적 분쟁에 나섰을 당시 공정위가 기획사를 일체 조사해 표준계약서 사용을 요청한 덕"이라고 말했다. .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9월 연습생 표준전속계약서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다만 임 변호사는 "문체부가 만든 표준계약서를 쓰는 곳도 있지만, (통상적으로) 연습생 전속계약서는 각 회사마다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습생의 경우 데뷔 시 본격적인 전속계약을 맺는데, 연예인 측에서 배분의 불투명이나 비인격적인 대우 등을 문제삼는 경우가 많다"며 "데뷔를 시키지 않거나 데뷔 후 반응이 별로 없을 때, 회사에서 활동을 시키지 않으면서 계약을 풀어주지 않는다는 불만도 많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