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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월드컵 우승 이끈 ‘독일의 전설’ 브레메, 63세 나이로 별세

지난 1990년 국제축구연맹(FIFA)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의 우승을 이끈 수비수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6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독일 매체 빌트는 20일 “브레메는 월요일 밤 뮌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근처 응급실에 입원했으나, 상황이 너무 늦은 뒤였다”라고 전했다. 원인은 심장 문제인 것으로 알려졌다.브레메는 선수 시절 자르브뤼켄·카이저슬라우테른·바이에른 뮌헨·인터 밀란·레알 사라고사 등에서 활약한 스타 플레이어다. 왼쪽 수비수는 물론,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나선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20대 중반의 나이에는 독일 대표팀으로도 나서 10년 동안 A매치 86경기 8골을 기록했다. 특히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1994 미국 월드컵 8강행을 이끈 주역이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에선 페널티킥 결승 골을 터뜨리며 팀의 우승을 이끈 바 있다. 월드컵 도움왕을 차지하며, 이해 발롱도르 3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브레메는 인터 밀란 시절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과 함께 게르만 트리오로도 활약하며 같은 시대 AC 밀란의 루드 굴리트·마르코 판 바스턴·프랑크 레이카르트의 맞수로 이름을 떨쳤다. 브레메는 이 기간 세리에·이탈리아 슈퍼컵·유럽축구연맹(UEFA) 컵 1회씩 품은 바 있다.1998년 현역 은퇴 뒤엔 친정 팀인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10년대엔 어드바이저로만 활약했다.독일 매체 빌트는 “로마의 월드컵 영웅”이라며 브레메에게 애도를 표했다.김우중 기자 2024.02.20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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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엔드게임] 이강철은 왜 카이사르를 소환했나

이강철 감독이 이끄는 야구대표팀이 5일 일본 오사카에 있는 마이시마 버팔로스 스타디움에서 가볍게 훈련했다. 일본에의 첫 공식 일정이었다. 대표팀은 여기서 두 차례 평가전을 벌인 뒤 도쿄로 이동,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를 치른다. 오는 9일 호주전이 첫 경기다. 미국 애리조나 투손에서 진행된 대표팀 캠프 분위기는 밝고 부드러웠다. 이강철 감독은 소속팀 KT 위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선수들과 친근하게 소통했다. 그러나 결전지에 도착한 뒤로는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어느새 전쟁을 앞둔 장수 같아졌다.이강철 감독의 의지는 한국야구위원회(KBO) 보도자료에 담긴 출사표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라운드의 전사가 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감독은 고대 로마 시대의 대정치가이자 장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의 명연설을 인용했다.카이사르의 저서인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그는 거대하고 야만적인 게르만족을 두려워하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렇게 역설했다. “게르만은 우리 선조가 쳐부순 바로 그 민족이다. 우리에게는 게르만족을 전멸시킬 수 있는 뛰어난 전략이 있다.”맞서 본 적 없는 거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자는 독려였다. 우리는 이미 그들을 이긴 적이 있다는 역설이었다. 2006 WBC 4강,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 WBC 준우승을 이뤄낸 선배들처럼 2023년 대표팀도 국민에게 명승부를 선물할 수 있다고 응원한 거다. 이강철 감독은 “우리 유니폼에는 ‘승리의 경험’이 새겨져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대표팀에는 김광현‧양현종‧김현수 등을 제외하면 한국 야구의 황금기를 경험한 선수가 거의 없다. 처음 대표팀에 뽑힌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팀은 오는 10일 메이저리그(MLB) 스타들이 즐비한 일본을 상대한다. 젊은 한국 선수들에게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같은 투수는 게르만족 같은 공포일 것이다. 2라운드에 진출한다면 만날 것으로 보이는 쿠바‧네덜란드의 전력도 한국보다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이강철 감독이 출국에 앞서 출사표를 낸 이유는, 갈리아 전쟁을 앞둔 카이사르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대를 만나기 전에 공포에 먼저 지는 걸 막고 싶은 것이다. 2013년과 2017년 WBC에서 한국은 1라운드 통과에도 실패했다. 이 감독은 가까운 패배의 기록을 묻어버리고, 찬란한 승리의 기억을 소환했다.큰 대회를 앞두고, 특히 전력상 언더독일 경우에는 리더의 한마디가 흐름을 바꿔놓는 경우가 많다. 2006년과 2009년 WBC를 이끌었던 김인식 감독이 짧은 말로 긴 여운을 만들 줄 알았다.김인식 감독은 2009년 대표팀 감독을 맡고 “나라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고 일갈했다. 당시 대표팀 코치진과 선수 구성이 어려웠던 상황을 통타한 거다. 당시 프로팀 감독들은 대표팀 코치로 오길 꺼렸고,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불참했다. 흩어진 이기심을 하나로 모으는 데 김인식 감독의 말처럼 강렬한 수사법은 없었다.2009년 WBC 대표팀은 예상을 깨고 또다시 3라운드(4강)에 진출했다. 이때 김인식 감독이 “위대한 도전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결승 진출 또는 우승을 목표로 내건 것보다 더 커 보였다. 대표팀은 결승전 연장 승부 끝에 일본에 패했으나, 그 여정은 충분히 위대했다.2009년 이후 대표팀은 수성에 실패했다. 가장 최근에는 도쿄 올림픽 노메달(4위)로 국민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이제 지켜낼 성이 없다. 다시 도전하는 입장이다.이강철 감독은 최근 기자와 만나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야구가 자꾸 위기라고 하는데, 난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잘할 겁니다.”지난 10여 년 동안 프로팀 감독은 대표팀을 맡기 꺼렸다. 전력은 예전만큼 좋지 않은데 책임과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이강철 감독은 손익 계산하지 않고 “정말 영광”이라며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그리고 선수들과 자기 자신을 다잡기 위해 격문에 가까운 출사표를 냈다. 이강철 감독의 기대대로 2023년 WBC는 한국 야구의 새 기회일 수 있다. 잘못하면 더 큰 위기일 수도 있다. 이제 카이사르의 또 다른 명언처럼 “주사위는 던져졌다”.오사카=김식 기자 2023.03.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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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철 감독의 출사표, "월드컵 투지-메시의 열정처럼…전사가 되겠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나서는 이강철 한국 야구대표팀 감독이 출사표를 올렸다. 이강철 감독은 3일 KBO를 통해 발표한 출사표에서 "그라운드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전사가 되겠다"라며 필승의 각오를 다졌다. "국가대표라는 무게, 국가대표팀이라는 명예와 자긍심, 국가대표팀 선수라는 영광,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무한한 책임을 새삼 절감한다"라고 운을 뗀 이강철 감독은 "국가대표의 유니폼이 갖는 엄중한 사명 의식은 저를 포함한 모든 선수, 코치진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 이런 일치감으로 그간의 염려를 넘어서서 최고의 팀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 감독은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보여준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의 투지와 선전이 저희에게도 힘이 된다"면서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열정과 승부는 저희에게 다시 한번 태극마크의 의미를 되새겨준다. 잊지 않겠다"라고 전했다. 아울러 이 감독은 "우리의 유니폼에는 승리의 경험이 새겨져 있다. 우리에게는 올림픽 금메달, WBC 준우승이라는 자랑스러운 경험이 있고, 어떠한 경우에도 함께해 주시는 국민 여러분이 계신다"고 말한 뒤, 응원하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보여드리겠다. 그라운드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전사가 되겠다"라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3일 SSG 랜더스 2군과의 연습경기에 앞서 출정식을 가졌다. 팬들 없이 출정식을 치른 이강철 감독과 KBO는 팬들에게 편지 형식의 출사표를 올리며 필승의 각오를 다졌다. 이날 경기 후에도 이강철 감독은 "이제 다 준비된 것 같다. 연습은 끝났고 실전으로 들어간다. 일본에 넘어가서도 준비를 잘하겠다"라고 다짐했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이튿날인 4일, 결전지인 일본으로 떠난다. 다음은 이강철 감독의 출사표 전문2023 WBC 국가대표팀 감독 이강철입니다.국가대표라는 무게, 국가대표팀이라는 명예와 자긍심, 국가대표팀 선수라는 영광,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무한한 책임을 새삼 절감합니다.저희들은 곧 격전의 현장으로, 국민 여러분들의 성원을 뒤로하고 떠나갑니다. 국가대표팀으로서의 명예 못지않게 승패가 갖는 무거운 책임 의식 또한 함께 가져갑니다.지난달 미국에서의 첫 소집 훈련 이후, 저희 팀은 정신적, 육체적, 기술적으로 담금질했습니다. 팀워크를 다졌습니다. 스스로를 평가하고 상대 팀을 분석했습니다.저희 팀 스스로,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어떻게 하면 하나 될 수 있는지. 그리하여 승리의 영예를 국민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준비하였습니다.물론 저희들과 맞붙을 다른 팀들도 한 나라의 국가대표팀입니다. 20개국 모두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 이상이 되도록, 특별한 두려움이 되도록 땀과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국가대표의 유니폼이 갖는 엄중한 사명 의식은 저를 포함한 모든 선수들, 코칭 스태프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이런 일치감으로 그간의 염려를 넘어서서 최고의 팀이 될 것입니다.특별히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보여준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의 투지와 선전은 저희들에게도 힘이 됩니다.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열정과 승부는 저희들에게 다시 한번 태극 마크의 의미를 되새겨줍니다. 잊지 않겠습니다.고대 로마 시대 때 카이사르의 군대가 당시 엄청난 전투력을 보유한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입니다.잠시 주저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이들과 싸워서 이긴 적이 있다. 뭐가 두려운가." 결국 로마의 승리였습니다.그렇습니다. 우리의 유니폼에는 승리의 경험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올림픽 금메달, WBC 준우승이라는 자랑스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함께해 주시는 국민 여러분이 계십니다.그간 한국 야구와 야구 국가대표팀에 보내주신 지지와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한국 야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저희들의 노력이 아닌 온전히 국민 여러분들의 응원과 열정이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다짐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다짐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희망과 감동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라운드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전사가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3.03.0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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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악연에서 인연으로, 포르투갈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과 함께 H조에 속해 있다. 포르투갈은 2022년 10월 기준으로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9위에 올라있는 강호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나 브라질을 피해 8강까지 노린다면 포르투갈과의 경기 결과가 중요하다. 포르투갈은 에우제비오, 루이스 피구,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과 같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를 배출한 나라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북한은 8강전에서 포르투갈에 3-0으로 앞서다, 에우제비오에게 4골을 헌납하고 5-3으로 역전패했다. 하지만 한국은 20년 전인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만나 1-0으로 이긴 기분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한국전에서 풀 타임 경기를 뛴 파울루 벤투가 현재 한국대표팀의 감독이다. 벤투외에도 현 대표팀에는 포르투갈 출신 코치가 4명 포진해 있다. 2002 월드컵 이후 거스 히딩크 감독의 후임으로 한국대표팀을 맡은 움베르투 코엘류도 포르투갈 출신이었다. 이외에도 전북 현대의 감독으로 K리그 2연패와 FA컵 우승을 이끈 조제 모라이스도 포르투갈인이다. 이렇듯 21세기 들어 한국과 포르투갈은 축구 분야에서 교류가 제법 많았다. 축구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한국과 포르투갈의 교류는 사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비록 간접적이지만 역사적으로 한국과 포르투갈의 관계는 악연으로 시작됐다. 그에 반해 포르투갈의 국민성은 의외로 한국인과 유사한 점이 꽤 많다고 한다. 20년 만에 우리는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다시 만났다. 한국과 포르투갈은 어떤 인연을 갖고 있을까? 발전된 항해술을 기반으로 유럽인들은 15세기 들어 세계 곳곳을 탐험했다. 이들은 아메리카대륙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 동아시아 등으로 진출하는 등 세계를 일주했다. 17세기까지 이어진 이 시기를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라고 부른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필두로 한 이 탐험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가세했고, 각 대륙과 문명이 연결되기 시작한다. 명실상부한 글로벌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북유럽의 바이킹이 해적질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적으로 한 것에 비해, 포르투갈은 세계 해적 역사의 원조다. 유럽 서쪽 구석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땅이 좁고 농지는 척박했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 국력으로는 육로를 통해 해외에 진출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대서양과 아프리카에 진출했다. 이들은 희망봉을 발견했고,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교역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처음 발을 디딘 서양인도 포르투갈인으로 추측된다. 네덜란드의 하멜보다 70여년 앞서 이들이 조선에 도착한 기록이 선조수정실록과 영국 문헌에 남아있다. 한편 포르투갈 탐험대는 표류 끝에 1543년 일본에 도착한다. 이들이 일본에 판 것이 바로 서양의 근대적인 장총이었다. 현재 가격 20억 원에 해당하는 은을 주고 2정의 총을 구입한 일본은 역공학(reverse engineering, 상품을 분해하여 생산 방식을 알아내는 것)에 돌입한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 끝에 일본은 총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조총이 개발된 것이다. 조선도 이 시기에 총을 만들 기회가 있었으나, 지도자들의 무관심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날렸다. 결국 16만 명의 조총수를 앞세워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당시 일본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용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포르투갈 영토인 마카오를 통해 건너왔다고 한다. 포르투갈과 무역을 오래 한 일본은 이들의 언어를 외래어로 많이 받아들였고, 이 중에 상당수가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반도로 전파됐다. 대표적인 예로 식품류로는 빵(Pao), 자몽(Jamboa), 담배(Tabaco), 카스텔라(Castella), 소보로(Soboro) 등이 있다. 튀김 요리를 일컫는 덴뿌라와 샐러드를 의미하는 사라다도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했다. 이외에 소매가 없는 옷인 조끼와 속옷인 메리야스도 포르투갈어가 기원이다. 포르투갈의 역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반된 모습을 담고 있다. 이들은 대항해 시절 미지의 땅을 개척해 부와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에서 가해자보다 피해자로서 훨씬 오랜 시간을 보냈다. 기원전부터 포르투갈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400여년 받았다. 로마의 철수 이후 게르만족이 이들을 공격했다. 8세기 들어서 포르투갈은 무어인(Moors,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교도)에게 지배당했고, 다시 기독교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500년 이상이 걸렸다. 내실이 단단하지 않았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식민지 전쟁에서도 다른 유럽 열강들에게 밀리게 된다. 1580년부터 60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당하기도 했던 포르투갈은 국력이 계속 약해졌다. 19세기 들어서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침략했다. 이들의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도 독립했다. 이후 내전을 겪은 포르투갈은 1926년 군사 쿠테타가 발생해 독재정권이 1974년까지 존재했다. 수많은 외침과 독재 정권 등 여러 면에서 포르투갈은 한국과도 닮은 점이 많다. 포르투갈의 민중음악인 파두(Fado)가 이들이 겪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여준다. 파두의 어원은 숙명을 의미하는 라틴어 파툼(Fatum, 로마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신)에서 유래했다. 파두는 기약 없는 그리움을 담은 노래로 한국인의 정서 한(恨)과 일맥상통한다. 대항해 시절 미지의 땅을 찾아 떠난 남편, 연인과 아들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절망과 한숨을 담은 노래 파두. 그리고 한민족의 얼과 한을 담은 아리랑. 슬프고 한스러운 역사를 가진 한국과 포르투갈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11.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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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월드컵에 나서는 바이킹의 후예들

8세기 후반부터 300여년 동안 약탈을 저지른 북유럽의 게르만족을 바이킹이라고 부른다. 바이킹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발판으로 전 유럽을 휩쓴 데 이어 북아프리카, 흑해, 페르시아, 그린란드, 북미지역에도 진출했다. 당시 유럽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이킹은 이교도이자 야만족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와 다르게 바이킹은 훌륭한 탐험가이자 상인이기도 했다. 또한 바이킹은 분쟁이 생기면 싸우지 않고, 회의와 표결을 걸쳐 의사를 결정하는 문화도 있었다.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시초인 영국의 의회제도도 이러한 바이킹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마초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바이킹 사회는 남녀평등을 중시하는 문화도 가졌다. 남성과 동등하게 전투에 참여한 쉴드 메이든(Shield-maiden, 방패의 처녀라는 뜻으로 바이킹 여전사를 의미)이 대표적인 예다. 아울러 바이킹 여성은 얼마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저분했을 것 같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바이킹은 상당한 수준의 위생적인 문화도 가졌다고 한다. 이들은 정리정돈에도 능했고 현대의 사우나 같은 목욕 문화도 가지고 있었다. 면도도 했던 바이킹들은 현재의 투블럭과 같은 헤어스타일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이킹은 오늘날의 노르웨이, 스웨덴과 덴마크 지역 출신으로 이루어졌다. 바이킹의 후손 중 축구를 가장 잘한 나라는 단연코 스웨덴이다. 스웨덴은 지금까지 12번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무려 4번이나 4강에 들었다. 최고 성적은 자국에서 개최한 1958 월드컵에서 기록한 준우승이다. 4년 전인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스웨덴은 8강에 들었지만,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2022~23시즌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압도적으로 골을 많이 넣고 있는 엘링 홀란드를 보유한 노르웨이도 2022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사실 노르웨이는 역대 월드컵 진출이 3번에 불과할 정도로 전통적인 축구 강국은 아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세계 최강 브라질과 4번 맞붙어 2승 2무를 기록해, 축구에서 브라질에 패배한 적이 없는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다. 본토 기준으로 현재의 덴마크는 바이킹 국가 중 영토가 가장 작다. 하지만 과거의 덴마크 왕국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아이슬란드를 통치했을 정도로 북유럽의 맹주였다. 북유럽 국가들 국기에서 볼 수 있는 치우친 십자기인 노르딕 십자도 덴마크가 원조다. 덴마크는 이웃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날씨가 온화하다. 고지대도 없고 1월 평균 온도가 1.5°C에 불과해 눈도 별로 안 내린다. 따라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덴마크는 동계스포츠에서 별 성적을 낸 적이 없다. 이들이 현재까지 동계올림픽에서 획득한 메달은 컬링에서 기록한 은메달 1개가 전부다. 하계스포츠 중 덴마크는 핸드볼에서 강세를 보인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압도적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는 단연 축구다. 2013년 자료에 의하면 덴마크는 전국에 1600개가 넘는 클럽이 있고 이곳에 등록된 축구 선수만 3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덴마크의 인구가 59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축구 인재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는 5번 본선에 진출했던 월드컵보다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에서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들은 9번 유로 본선에 진출해 4번이나 4강에 들었다. 특히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92에서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은 신들린 선방을 보여주었고, 결승에서 독일을 2-0으로 꺾고 우승했다. 덴마크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나라이자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더불어 덴마크는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블록 장난감인 ‘레고’의 나라이기도 하다. 낙농업도 발달해 있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품은 “Probably the best lager in the world(아마도 세계 최고의 라거일 것)”라는 슬로건으로도 유명한 칼스버그 맥주다.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등 세계적인 맥주 회사들은 축구를 포함해 다양한 스포츠에 스폰서로 참여해 왔다. 하지만 칼스버그는 축구에 진심인 회사다. 칼스버그의 전통적인 목표 고객(target audience)은 축구 팬인 관계로, 그들의 스폰서십 투자는 대부분 축구에 집중됐다. 이 덴마크 맥주회사는 월드컵과 유로 대회를 비롯해 여러 축구 클럽을 후원했다. 특히 칼스버그는 1992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리버풀의 셔츠 스폰서였다. EPL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셔츠 스폰서였던 칼스버그는 단순히 후원자가 아니라, 리버풀의 성공과 좌절을 함께 보낸 상징적인 존재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덴마크 축구대표팀의 서포터들은 롤리건(Roligan)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Rolig’는 덴마크 언어로 평온(calm)을 뜻한다. 훌리건과 반대되는 개념의 이들은 스포츠맨 답지 않은 행동이나 폭력에 반대하고 차분하고 경쾌하게 대표팀을 응원한다. 롤리건은 최고의 국가대표팀 팬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덴마크는 2022 월드컵에서 프랑스, 호주, 튀니지와 함께 D조에 속해 있다. 16강 진출이 유력하게 점쳐지는 덴마크가 이번 월드컵에서는 어떤 스토리를 전해줄지 기대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11.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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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잉글랜드 상대로 반란 꿈꾸는 웨일스

유럽에서 가장 큰 섬인 브리튼(Britain)에 영국이 있다. 브리튼 섬의 첫 주인은 기원전 5세기경 유럽에서 건너온 켈트족이다.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는 기원전 55년에 브리튼 섬을 처음 침공했고, 이후에도 여러 번 공격을 감행한다. 마침내 로마는 서기 43년 브리튼 섬 남쪽을 점령했다. 이후 로마는 400여년 동안 브리튼 섬을 지배한다. 켈트족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 문화에 동화된다. 하지만 쇠퇴하던 로마 제국은 395년 동서로 분열됐고, 410년 로마군은 브리튼 섬에서 철수했다. 로마군이 떠나자 섬의 북쪽, 지금의 스코틀랜드 지역에 살던 픽트족이 남쪽을 노린다. 이에 켈트족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유럽 대륙에서 용병을 데려온다. 이들 용병이 게르만의 일파인 앵글로 색슨족이다. 이들은 자기들 고향과 비교해 너무나 비옥하고 따뜻한 브리튼 섬에 매료된다. 이에 앵글로 색슨은 켈트족을 배신하고 이들을 공격한다. 결국 섬의 남쪽을 차지한 앵글로 색슨족은 일곱개의 왕국을 세웠다. 앵글로 색슨족의 공격을 받은 켈트족은 섬의 남서쪽인 현재의 웨일스 지역으로 피신한다. 웨일스(Wales)라는 단어는 고대 영어로 “외국인의 땅(land of foreigners)”을 의미한다. 켈트족은 귀네드 왕국과 여러 소국을 세워 명맥을 유지했다. 13세기 귀네드 왕국의 흘러웰린 왕은 웨일스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며 자신을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으로 칭했고, 당시 잉글랜드 군주였던 헨리 3세는 이를 승인했다. 헨리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브리튼 섬의 통일을 위해 봉신 관계에 있던 웨일스를 공격한다. 웨일스 공국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1301년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아들인 왕세자에게 웨일스 공 작위를 수여했고, 이로써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종속된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영국 왕 계승 예정자인 왕세자는 웨일스 공을 겸한다. 현재 웨일스 공은 찰스 3세의 장남 윌리엄 왕자다. 영국 국기인 ‘유니온 잭(Union Jack)’은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국기는 성(聖) 조지(잉글랜드), 성 앤드루(스코틀랜드)와 성 패트릭(아일랜드)을 상징하는 십자가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에 웨일스의 상징은 유니온 잭에 왜 반영되지 않았는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다. 이유가 있다. 웨일스 지역은 16세기에 잉글랜드와 완전히 병합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될 때,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당시 이들은 독자적인 국기도 없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연장선상에 불과했다. 웨일스는 1955년까지 수도가 없어, 런던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레드드래곤’이 들어간 현재의 웨일스 국기도 1959년에 만들어졌다. 전통적으로 웨일스를 상징하는 레드드래곤이 유니온 잭에 포함되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없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관계를 의붓아버지와 아들에 빗대는 이들도 있다.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원치 않은 아들이고, 웨일스는 의붓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없으나 약간의 돈을 받는 것에 만족하며 이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웨일스는 스코틀랜드와는 달리 영국에서 독립하겠다는 의지가 약하다. 강원도보다 약간 큰 면적에 320만 인구를 가진 웨일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럭비다. 웨일스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같은 럭비에서 세계 최강 팀 중 하나다. 웨일스는 1987년 시작하여 4년 주기로 개최되는 럭비 월드컵에 9번 모두 참여했고, 4강에도 3번 진출했다. 럭비에 비해 웨일스 축구는 유럽에서 변방에 가깝다. 웨일스의 월드컵 데뷔는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이루어졌다. 조별 예선을 통과해 8강에 진출한 웨일스는 이 대회의 우승팀이 될 브라질을 만나 선전했으나, 축구 황제 펠레에게 결승골을 내줘 0-1로 아쉽게 패했다. 웨일스는 1980년대에 마크 휴즈와 이안 러시라는 걸출한 스타를 앞세워 월드컵과 유로 대회 본선에 도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은 1990~2000년대에도 라이언 긱스와 크레이그 벨라미를 앞세워 부활을 꿈꿨으나 메이저 대회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2010년대 들어 가레스 베일과 아론 램지 등을 앞세운 웨일스는 메이저 본선을 다시 두드렸고, 결국 2016 유로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당시 잉글랜드는 인구 30만의 아이슬란드에 2-1로 지며 8강 진출에 실패한 데 반해, 웨일스는 4강에 진출했다. 웨일스가 잉글랜드와의 간접 대결에서 이긴 것이다. 웨일스는 2020유로 대회에서도 16강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6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1-0으로 꺾고 웨일스는 2022 카타르 월드컵 티켓을 거머쥐었다. 무려 64년 만에 웨일스가 두 번째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웨일스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잉글랜드, 미국, 이란과 함께 B조에 속해 있다. 만약 웨일스가 축구가 아닌 럭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만났다면 분위기가 크게 달랐을 것이다. 웨일스에서 럭비는 종교이고, 잉글랜드는 퇴마의 대상인 악마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2016유로에서도 웨일스는 잉글랜드와 B조에 같이 속했다는 것이다. 당시 웨일스는 세네갈이 2002 월드컵에서 프랑스를 꺾었듯이 피지배자의 반란을 꿈꿨다. 하지만 후반 추가 시간에 골을 허용한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1-2로 아쉽게 졌다. 6년 만에 메이저대회에서 다시 만난 웨일스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이번에는 반란에 성공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11.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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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나폴리는 이탈리아가 아니다”

1990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은 이탈리아에서 열렸다.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가 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개최국 이탈리아였고, 장소는 남부의 항구도시 나폴리였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주장이었던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나폴리는 익숙한 곳이었다. 6년 전 SSC 나폴리로 이적한 마라도나는 이곳의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를 상대하기에 앞서 나폴리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폴리는 이탈리아가 아니다.” 따라서 시민들은 이탈리아가 아닌 자신이 소속된 아르헨티나를 응원해달라는 말이었다. 마라도나는 무슨 이유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이탈리아는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지역 차별로도 유명한 나라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자. 로마제국은 이탈리아반도를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으나 395년 동서로 갈라진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이탈리아 반도는 분열된다.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을 통해 유럽에 근대 민족주의가 싹트며 통일 이탈리아를 꿈꾸는 시도가 처음 나타났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반도에 위성 국가를 여러 개 만들며 이탈리아를 더욱 쪼개 놓았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유럽 열강들은 전후의 질서를 논의한 끝에 ‘빈 체제’를 만든다. 이 결과 남부에는 스페인이 장악한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 북부에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 세워진다. 또한 중부 로마에는 교황령, 북서부에는 사르데냐 왕국이 있었다. 1840년대 유럽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강하게 일며 통일 이탈리아를 향한 열망도 커진다. 마침내 사르데냐 왕국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며 북부를 해방시켰다.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은 남쪽의 양시칠리아 왕국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했다. 이후 가리발디는 조건 없이 남부 지역을 사르데냐 왕국과 합치며 1861년 통일 이탈리아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던 이탈리아는 하나의 국가라는 공동체 인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부와 남부는 여러 면에서 너무 달랐다. 두 지역은 인종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북부는 게르만계 혈통의 영향을 받아 큰 키에 금발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데 반해, 아랍계 혈통의 영향을 받은 남부는 작은 키에, 짙은 머리색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특히 경제력 차이에서 나온다. 북부는 밀라노, 토리노와 항구도시 제노바를 연결한 삼각지대를 중심으로 일찍이 산업화가 이루어져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그에 반해 농업 중심의 남부는 가난했다. 이러한 경제적 격차는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7년 기준 이탈리아의 경제수도 밀라노가 위치한 롬바르디아주의 1인당 소득은 3만 8500유로였고, 북부 주요 도시들은 3만 유로를 훌쩍 넘겼다. 하지만 남부의 대표도시 나폴리는 1만 8700유로에 불과했다. 북부인들은 오랫동안 “우리의 세금으로 남부를 먹여 살린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유럽이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되면서 유럽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열리자, 북부에 소비시장과 인력 공급처 역할을 했던 남부의 필요성은 더욱 떨어졌다. 이에 북부를 파다니아(Padania)라는 이름으로 독립시키려는 목표로 극우정당 북부연맹이 출범했다. 이들은 현재도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경제력의 차이는 축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1부리그인 세리에 A 클럽의 절대다수는 북부에 위치해 있다. 물론 우승도 북부 팀이 휩쓸어 갔다. 토리노에 위치한 유벤투스(36회)가 압도적으로 많은 우승을 기록한 가운데, 인터 밀란과 AC 밀란이 각각 19번 우승했다. 124년의 역사를 가진 세리에 A에서 북부지역 외의 클럽이 우승을 차지한 경우는 단 8차례에 불과하다. 로마제국 이후 이탈리아는 약 1400년 동안 분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자 다른 문화와 풍습으로 오랫동안 살았던 반도 사람들은 타 지역에 대한 거부감 역시 높다. 밀라노 같은 북부도시는 중부 로마에 위치한 클럽에도 공공연한 반감을 드러낸다. 일례로 2002 한일월드컵 16강전에서 이탈리아가 대한민국과 경기 중 대표팀의 에이스이자 AS 로마의 상징과 같은 프란체스코 토티가 퇴장 당했을 때 북부인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렇게 중부 팀에도 반감을 보이는 북부에서 남부팀은 야만인, 하수구의 쥐 같은 취급을 받는다. 1926년 창단되어 남부를 대표하는 클럽이 된 나폴리는 한동안 세리에A와 B를 오가는 그저 그런 팀이었다. 그러한 나폴리가 1960~1970년대에 코파 이탈리아에서 2번 우승하고, 세리에 A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적이 여러 시즌 있었다. 하지만 이 클럽은 1984년 승점 1점 차이로 겨우 강등을 면하는 위기에 직면한다. 1984년 6월 나폴리는 바르셀로나로부터 마라도나를 영입하는 도박 같은 결정을 내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남부의 가난한 클럽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선수를 품은 것이다. 바르셀로나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 마라도나는 나폴리에서 행복을 찾았다. 아울러 부유한 북부 클럽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나폴리에 마라도나는 동질감마저 느낀다. 자신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라도나와 나폴리의 특별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잠재력을 믿었고, 클럽은 그와 함께 발전해 나갔다. 나폴리는 결국 1987년 팀 창단 61년만에 세리에 A에서 첫 우승을 달성한다. 이후 나폴리는 1989~90시즌 리그 우승을 한 번 더 차지했고, 유럽축구연맹(UEFA) 컵마저도 석권하는 기염을 토한다. 차별과 조롱의 대상이었던 나폴리를 세리에 A와 유럽 정상에 올려놓은 마라도나에 시민들은 열광했고, 그는 나폴리의 신 같은 존재로 등극한다. 한편 마라도나는 나폴리에서 뛴 관계로 이미 북부지역에서는 공공의 적이었다. 그런 그가 이탈리아와의 월드컵 준결승전을 앞두고 아르헨티나를 응원해달라고 말하자 여론은 들끓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지역감정을 이용한 마라도나에 분노했다. 나폴리 시민들은 고민 끝에 경기장에 걸린 커다란 배너에 이렇게 답했다. “마라도나, 나폴리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탈리아는 우리의 조국입니다.” 후에 마라도나는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국가가 연주될 때 야유를 보내지 않은 경기장은 나폴리가 유일했다며 감사의 말을 전한다. 준결승전에서 두 나라는 1-1을 기록한 후 승부차기에 들어간다. 4번째 키커로 나온 마라도나의 득점에 힘입어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를 4-3으로 누르고 결승에 진출한다. 이후 이탈리아는 그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눈감아주던 마라도나와 연관된 마약, 매춘 등도 수면위로 떠오른다. 도핑검사 결과 15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그는 나폴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라도나가 1984년 나폴리에 입단할 당시 그를 환영하려고 경기장에 모인 관중은 7만5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떠날 때 그는 혼자였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8.24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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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가깝고도 먼 나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2022 카타르 월드컵 B조에는 잉글랜드, 이란, 미국이 속해 있다. 남은 한 자리를 놓고 웨일스, 스코틀랜드, 우크라이나가 경쟁 중이다.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27위인 우크라이나와 스코틀랜드(39위)가 6월 1일 맞붙는다. 그리고 이 경기의 승자가 나흘 후 웨일스(18위)와 대결해 B조 마지막 자리의 주인공을 가린다. 객관적인 전력, 경기 일정과 장소에서 웨일스가 유리하다. 하지만 공은 둥글고 축구는 해봐야 안다. 스코틀랜드가 B조의 한 자리를 차지하면, 축구에서 최초로 국제경기를 벌인 잉글랜드-스코틀랜드전이 월드컵 본선에서 처음으로 열리게 된다. 필자는 2회에 걸쳐 이 두 나라의 라이벌 관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축구 라이벌전을 이해하려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가진 애증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원전 55년 로마의 카이사르는 브리튼 섬을 처음 공격했고, 이후 로마제국은 여러 번 침공을 감행해 섬 남쪽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로마는 브리튼 섬의 원주민인 켈트족, 픽트족 등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며 섬 전체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한다. 원주민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122년 로마는 현재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경 부근에 5~6m의 높이에 약 120㎞ 길이의 방벽을 세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은 로마의 북방 경계선이었다. 로마인의 기준으로 브리튼 섬 원주민들은 야만족이었다. 따라서 이 방벽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방벽 위쪽의 스코틀랜드 지역을 ‘칼레도니아(Caledonia)’라고 불렀다. 4세기 후반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위기에 처한 로마는 브리튼 섬에서 군대를 철수한다. 이후 독일에서 건너온 게르만 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이 브리튼 섬의 남부를 차지하면서 7왕국을 세웠고, 이 곳을 앵글로들의 땅인 잉글랜드라고 부르게 된다. 섬 북쪽의 픽트족은 스코트족에 동화됐고, 이들은 843년 스코틀랜드 왕국을 세운다. 한편 7왕국 중 하나였던 웨식스는 알프레드 대왕의 지휘하에 바이킹의 대규모 침략을 막아낸다. 이어 대왕의 손자인 애설스탠이 927년 잉글랜드를 통일해 잉글랜드 왕국을 건설했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1072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한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 가한 첫 공격이었다. 윌리엄의 군대는 스코틀랜드의 말콤 3세를 격파했고, 그의 아들 던컨을 인질로 잡아갔다. 1286년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가 갑작스럽게 낙마사하자, 마땅한 후계자가 없어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생긴다. 이러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개입해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실질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게 된다. 한편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가스코뉴 지방의 영유권을 두고 갈등을 겪는 가운데,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손을 잡는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스코틀랜드를 점령했고, 왕권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Stone of Scone)’도 빼앗아간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잔혹하게 통치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이 폭발했고 독립전쟁이 벌어진다. 당시 독립을 이끈 두 인물이 할리우드 영화 ‘브레이브하트(Braveheart)’의 주인공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윌리엄 월레스와 넷플릭스 영화 ‘아웃로 킹(Outlaw King)’의 로버트 1세였다. 수차례 전투 끝에 로버트 1세는 결국 승리하여 1328년 스코틀랜드에 독립을 안겼다.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로 유명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후계자 없이 1603년 임종했다. 이러자 여왕과 가장 가까운 친척인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두 나라는 여전히 안 좋은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같은 군주를 모시게 된 것이다. 이렇게 동일 군주 아래 2개 이상의 국가가 결합하는 것을 ‘동군연합(Personal union)’이라고 부른다.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를 맞아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으로 국부를 쌓게 되자, 스코틀랜드도 이에 동참한다. 17세기 후반 이들은 북미와 남미를 잊는 좁은 길목인 다리엔(Darién)에 주목했다.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에 ‘뉴칼레도니아’를 설립하여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 거점을 만들고, 부와 영향력을 얻고자 했다. 스코틀랜드는 모든 경제력을 동원해 다리엔에 올인했다. 하지만 그곳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극한의 오지였다. 농사도 지을 수 없었고 풍토병도 만연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중남미의 맹주였던 스페인은 그곳을 자신의 영토라 여겨, 스코틀랜드 원정대를 공격했다. 결국 국운을 건 다리엔 1, 2차 원정대는 처참하게 실패한다. 이 와중에 1690년대 스코틀랜드는 흉작, 기근으로 인해 인구의 15%가 사망하는 ‘불운한 7년(Seven ill years)’까지 겪게 된다.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다. 이러자 잉글랜드가 합병안을 들고나온다. 합병안은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의 빚을 갚아주는 대신 연합왕국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스코틀랜드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오랫동안 미워하고 싸웠던 두 나라는 결국 1707년 합병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으로 하나가 되었다. 이후 1801년 아일랜드까지 합쳐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탄생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6.0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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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9, 7월 5일 컴백···'글로리' 마침표 찍을 'Tear Drop' [공식]

그룹 SF9(에스에프나인)이 7월 5일 컴백을 예고했다. SF9(영빈·인성·재윤·다원·로운·주호·유태양·휘영·찬희)의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는 22일 SF9 공식 SNS 채널을 통해 미니 9집 'TURN OVER(턴 오버)'의 타이틀 포스터를 게재했다. 공개된 이미지에는 신곡 제목인 'Tear Drop(티어 드롭)'이 적혀있는 가운데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카드가 나열되어 있다. 초기 게르만족 등 북유럽에서 사용되었던 고대 표음문자인 '룬(Runes)' 문자로 이루어진 세 장의 카드에는 역방향으로 배치한 'GLORY(영광)'를 비롯해 'CHANCE(기회)', 'CHANGE(변화)' 등의 단어가 적혀있어 새 앨범의 스토리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SF9의 미니 9집 'TURN OVER'는 SF9이 지난해부터 전개하고 있는 세계관 시리즈 '9lory(글로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이다. SF9은 구(球)를 이룬 9개의 황금 팔찌를 중심으로 하여 마침내 하나가 된 SF9을 그린 정규 1집 'FIRST COLLECTION', 찬란한 영광의 순간을 담은 미니 8집 '9loryUS'등 두 장의 '9lory' 시리즈 앨범으로 SF9만의 세계를 그려나갔다. 이번 앨범에서는 'TURN OVER'라는 앨범명이 말해주듯 설사 그것이 비극적일지라도 정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SF9의 의지를 드러내며 '9lory' 시리즈의 마지막을 완성할 계획이다. 운명을 바꾸는 매개는 눈물(Tear Drop)로, SF9은 타이틀 곡 'Tear Drop'을 통해 비극의 상황을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미니멀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남다른 피지컬에서 만들어지는 세련된 춤선과 독보적인 표현력을 더해 'Tear Drop'에 담긴 깊은 서사를 몰입도 높게 표현하겠다는 각오다. 한편, 7월 5일 컴백을 예고한 SF9 미니 9집 'TURN OVER'의 프로모션 콘텐츠는 SF9 공식 SNS 채널을 통해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홍신익 디지털뉴스팀 기자 hong.shinik@joongang.co.kr 2021.06.2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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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세운 명문 클럽, 셀틱 FC

유럽인들 중에서 한국인과 유사한 민족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탈리아와 한국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같은 반도 국가에, 날씨도 비슷한 편이고, 흥분 잘하는 국민성을 예로 든다. 하지만 아일랜드인이 한국인과 공통점이 더 많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두 나라 국민은 자기 민족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강대국에 끊임없이 시달려온 역사로 인해 두 민족에게는 한(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악조건 속에서도 두 민족은 뛰어난 문화를 발전시켰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국민성도 비슷하다. 발전 과정은 다르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도약 한 점도 두나라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 중 상당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국으로 이주했듯이, 아일랜드도 뿌리 깊은 이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 칼럼에서는 스코틀랜드로 이민 간 아일랜드인들이 설립한 하이버니안 FC에 대해 알아보았다. 라틴어로 아일랜드 섬을 의미하는 하이버니아(Hibernia) 말고도,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연관된 대표적인 이름이 바로 셀틱(Celtic)이다. 켈트족(Celts)과 관련된 유물은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기원전 3세기에 아일랜드와 영국을 포함해 알프스 산맥 북쪽의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다. 멀리는 동쪽의 터키 지역까지 진출했다. 기원전 1세기 줄리어스 시저의 로마 군대는 켈트족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여, 이들을 격파했다. 로마와의 전쟁에 패한 켈트족들은 영국 쪽 섬지방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55년부터 로마 제국의 라틴족은 여러 번 영국을 침공해 켈트족과 전쟁을 벌였고, 현재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을 점령했다. 전쟁에 패한 켈트족은 북쪽이나 주변 섬 등의 오지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제국은 결국 5세기 초반까지 약 400년 동안 스코틀랜드 지역을 제외한 브리튼(Britain) 섬을 다스렸다. 라틴족이 철수한 이후, 독일에서 건너온 게르만족의 한 파인 앵글로 색슨(Anglo-Saxon)이 브리튼 섬을 침공하면서 잉글랜드가 형성되었다. 그에 반해 켈트족은 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지역에 자리 잡은 변방 종족이 되었다. Celt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가 Celtic이다. 오늘날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이 포함된 셀틱 국가들의 언어와 문화를 의미한다. Celtic이라는 단어가 셀틱(Seltic)혹은 켈틱(Keltic)으로도 발음되기에, 도대체 어느 발음이 맞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다. S로 시작하는 발음은 불어 Celte에서 유래했다. 또한 영어의 발음 규칙에 의하면 알파벳 c 다음에 e 혹은 i가 오면 S로 발음한다. 영어 단어 cell, cereal, circus를 발음해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 언어 역사학자들은 K 발음이 단어의 어원인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더 잘 반영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현대 영어에서는 K 발음이 좀 더 널리 쓰인다. 단 미국프로농구(NBA)의 보스턴 셀틱스 등 스포츠팀에 한해서는 S 발음으로 사용된다. 1840년대 대기근의 영향으로 아일랜드를 떠나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이민자들의 상당수는 글래스고우에 정착했다. 1875년 에든버러에서 설립된 하이버니안 FC에서 영감을 받은 이들은 1887년 이민자들의 빈곤을 돋기 위한 기금 모금 수단으로 축구팀을 설립한다. 이 팀은 셀틱 FC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뿌리인 켈트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셀틱은 이후 승승장구하며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명문 클럽으로 자리 잡았다. 셀틱은 1965년부터 1974년까지 9시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고, 또한 영국 클럽으로는 최초로 1967년 유로피언 컵(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에서 우승하는 영광을 누렸다. 단일 시즌에 자국의 1부 리그 우승, FA 컵과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면 트레블(Treble)이라고 말하는데, 셀틱은 유럽 클럽 최초로 1966~67시즌에 이를 달성했다. 셀틱을 이야기할 때 ‘아덴라이 평원(The Fields of Athenry)’이라는 현대 민요를 빠뜨릴 수 없다. 대기근을 배경으로 한 이 노래의 가사는 마이클과 메리 부부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다. 마이클은 굶주린 가족을 위해 옥수수를 훔치다 감옥에 갇힌다. 호주로 유배 가기 전날 마이클은 메리를 위로하면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 달라고 부탁한다. 메리는 남편을 실은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1990년대 들어 아일랜드 축구대표팀과 셀틱 FC의 응원가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UEFA 유로 2012에서 당시 최강 스페인과 붙은 아일랜드는 실력 차를 실감하며 0-4로 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팬들은 자국의 예선탈락이 확정적인 후반 38분부터 종료 휘슬이 울린 후까지 '아덴라이 평원'을 열창해 전 세계 많은 축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독일 방송국의 해설진은 '아덴라이 평원'이 울려 퍼지는 동안 현장의 감동적인 모습을 시청자에게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독일 축구 중계팀과 아일랜드 팬들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이러한 수준 높은 장면은 시청자와 현장을 하나로 묶는 품격 있는 방송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수준의 중계는 단순히 방송 기술의 향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축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이러한 중계를 국내에서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초창기 셀틱의 팬들은 스코틀랜드에 정착한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하지만 셀틱의 성장과 더불어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 등에 사는 아일랜드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팬으로 가세한다. 아울러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팬들까지 등장한다. 현재 셀틱은 전 세계에 걸쳐 200개가 넘는 서포터스 클럽을 거느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정우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1.01.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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