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중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사드) 보복이라는 이중고에 신음하고 있다. 주요 시장인 G2가 협공을 하는데도 현대·기아차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다 국정공백 상태여서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쉽지 않아 혼자 애만 태우고 있다.
중국 '사드 보복'
13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기아차는 최근 국내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노골적인 보복성 조치가 확대되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다.
지난 2일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는 중국 장쑤성 치둥현의 롯데백화점 부근에 신원 불명의 건달들이 나타나 '롯데가 중국에 선전포고했으니 중국을 떠나라'를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한 뒤 근처의 한국 자동차를 부수는 사진이 올라왔다. 파손된 차량은 한중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차로 뒷유리창이 모두 깨졌다.
또 다른 웨이보에선 한국 업체 직원이 밖에 세워둔 현대·기아차 차량의 타이어가 펑크나고 유리창이 깨진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모두 지난달 28일 국내 사드 배치 부지가 확정된 이후 벌어진 일이다. 업계에서는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 내 반한 감정이 고조되면서 대표적인 한국기업인 현대·기아차 역시 피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중국 언론이 반한 감정을 부추기는 것도 현대·기아차의 고민을 깊어지게 하고 있다. 롯데가 사드 부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와 언론의 뭇매를 맞은 데 이어 사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현대·기아차에도 중국 언론이 부정적인 보도를 쏟아내며 칼끝을 겨누는 모양새다.
실제 중국 환구시보의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는 지난 1일 "중국은 현대·기아차에 가장 큰 시장이며 이 기업에 제재를 가한다면 복잡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며 "그러나 한중 갈등이 가속하고 있어 현대·기아차도 조만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만약 불매운동이 벌어질 경우 현대·기아차는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은 현대·기아차 전체 판매량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현대차는 중국에서 지난해 113만3000대의 자동차를 판매했다. 전체 판매의 5분의 1에 달하는 만큼 현대차가 가장 공을 들이는 시장으로 평가된다. 기아차도 중국 판매의 비중이 현대차와 비슷하다.
특히 현대·기아차는 지난 2012년 센카쿠열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중국이 대립하면서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중국에서 판매량이 크게 감소했던 일이 재연되지는 않을지 노심초사 하고 있다.
당시 도요타·혼다·닛산 등 일본 완성차 업체 3사의 판매량은 연간 4% 감소했다. 이들 3사의 시장점유율은 2012년 7월 18.6%에서 10월 7.3%까지 하락했으며 2013년 2월까지 6개월 평균 점유율은 10.5%에 머물렀다. 이와 관련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직접적인 제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며 "현재 동향을 잘 파악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보호 무역'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자동차 시장으로 꼽히는 미국도 현대·기아차의 발목을 잡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앞세워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에도 미국 내 공장 건설 등 '통상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요구를 무시하자니 관세 등 '보복'이 두렵고, 압박에 못 이겨 현지에 공장을 건설하자니 임금 등 고비용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 관련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자 앞다퉈 투자와 공장 ·증설 계획을 내놓고 있는 것도 현대·기아차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포드는 미국 미시간주에 공장 신설 계획을 밝혔고, 피아트크라이슬러(FCA)는 10억 달러(1조1400억원)를 투자해 2000여 명을 추가 고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도요타도 앞으로 5년 100억 달러(11조4400억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다. 삼성과 LG 등 국내 기업들도 공장 신설을 검토 중이다.
현대차도 지난 1월 17일 향후 5년간 31억 달러(약 3조56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밝히면서 일단 트럼프의 '예봉'은 피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미래 신기술 연구개발(R&D)과 기존 생산시설 환경개선 투자만 포함돼 있을 뿐 신규 공장 건립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차가 공장 건립을 주저 하는 이유는 국내 공장 가동률 저하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전년보다 1.7% 증가한 77만5000대를 판매했다. 이중 절반 정도 물량(38만7000대)은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생산·판매했고, 나머지 물량은 대부분 국내에서 수출했다. 만약 미국에 공장을 짓는다면 국내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미국 공장의 수익성도 따져볼 문제다. 오히려 현대차는 올해 미국 생산 계획을 38만대로 낮춰 잡은 상태다.
지난해 양산을 시작한 멕시코 공장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는 기아차도 트럼프 행정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를 재협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데 따라 기아차 멕시코 공장을 증설하거나 가동률을 높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기아차가 최대 시장인 중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여기에 기대를 모았던 러시아와 중동 등 신흥국 시장에서 예상치를 밑도는 성적표를 받으면서 우려는 더욱 커지는 양상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