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나이티드와 감바 오사카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H조 최종 6차전이 열린 지난 9일 제주월드컵경기장.
제주 선수들은 한 남자의 발끝만 바라봤다. 그에게 볼이 전달되자 제주 선수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때부터가 경기의 백미다. 그가 전방에 볼을 배급하는 방식에 따라 흐름은 요동쳤댜. 그가 볼을 바쁘게 돌리면 제주 공격진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패스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제주 공격은 성난 파도처럼 몰아쳤다. 그러다 그가 속도를 늦추기라도 하면 제주의 공격은 언제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그는 마치 발끝으로 축구의 리듬을 지휘하는 것 같았다. 제주의 '마에스트로(maestro·지휘자)' 권순형(32)이다.
미드필더 권순형은 올 시즌 K리그를 넘어 아시아로 향하는 '제주발 태풍'의 중심이다. 감바 오사카전(2-0승) 승리로 H조 2위에 오른 제주는 창단 후 첫 AFC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진출했다. 제주는 K리그 팀 중 유일하게 16강에 오르며 'K리그의 자존심'으로 떠올랐다. 함께 출전한 FC 서울·수원 삼성·울산 현대는 조별리그 탈락했다.
정규리그도 '제주 세상'이다. 제주는 현재 KEB하나은행 K리그 클래식(1부리그) 2017 선두를 질주 중이다. 조성환(47) 감독은 "순형이는 제주의 숨통을 틔워 주는 소중한 선수"라며 "워낙 패스 센스가 좋아서 순형이가 볼을 잡는 순간 만큼은 벤치도 마음을 놓는다"고 칭찬했다.
권순형의 킥은 노력의 산물이다. 잠원초 4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은 그는 왜소한 체격에 무난한 실력을 지닌 선수였다. 하지만 '전통의 명문' 동북중에 진학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난다 긴다 하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평범한 권순형은 입지가 더 좁아졌기 때문이다.
권순형은 "또래에 비해 키가 5~6cm 작은 데다 몸통도 얇은 편이라서 체격이 더 작아보였다. 고민 끝에 패스와 슈팅 능력을 키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반대쪽 골문 근처에 놓인 공을 맞히는 연습을 하는가 하면 숙소 건물 벽의 한 지점을 조준하는 방식 등으로 킥의 세밀함을 키웠다. 매일같이 반복한 연습 덕에 그는 팀의 에이스로 올라서며 중3 때 전국대회 4관왕을 이끌었다.
동북고를 거쳐 고려대 입학을 앞둔 시점에는 어느덧 전국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돼 있었다. 권순형은 "현재 176cm인데 여전히 선수치고는 큰 편이 아니다. 지금도 쉬지 않고 킥을 연마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지금도 팀 훈련 뒤 롱패스 10개를 추가로 찬다. 그는 "비록 하루 10개지만 100번 하면 1000개가 된다"며 웃었다.
권순형의 또 다른 무기는 스피드다. 그는 "축구 경기는 전쟁터와 같다. 판단이 1초라도 늦으면 적군에게 잡힌다"고 했다. 아무리 패스 능력이 좋아도 내줄 곳을 찾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그의 해결책은 동료와 '소통'이었다. 그는 동료 공격수들을 일일이 찾아가 '어떻게 패스를 받는 게 편한가'를 물었다. 선수들의 특성을 완벽히 파악해 움직임을 보지 않고도 패스를 찔러주는 '약속된 플레이'를 준비한 것이다.
권순형은 "안현범과 황일수처럼 스피드가 좋은 선수는 빈 공간으로 보내는 공을 선호한다. 반면 마르셀로나 멘디처럼 볼 컨트롤에 자신감을 가진 선수들은 정확히 발밑으로 달라고 주문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선수가 어디로 뛸 지 미리 알고 있다면 아무리 순간 판단력이 좋은 상대를 만나도 이길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감바 오사카전은 꾸준히 준비해 온 '맞춤식 패스'의 진가가 드러난 경기였다. 후반 21분 하프라인 후방 오른쪽에서 볼을 받은 권순형은 전방 왼쪽 끝 텅빈 공간을 파고드는 황일수(30)에게 '로켓 패스'를 성공시키며 도움을 기록했다. 상대 수비수 셋은 그저 허공만 바라봤다.
그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 하겠다. 제주가 이길 수 있도록 패스가 끊기지 않고 동료들에게 이어지도록 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