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서정(18·경기체고).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최고 스타 중 하나였다. 이 대회 기계체조 여자 도마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여자 기계체조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1986 서울아시안게임 이후 32년 만이었다. 이슈가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한국 도마의 '신'이라 불린 여홍철 경희대 체육학과 교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천재 소녀의 등장에 이목이 쏠렸다.
이후 여서정은 2019 국제체조연맹(FIG) 기계체조 월드컵 대회 여자 도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서 최초의 영광이었다. 또 제3회 코리아컵 제주 국제체조대회 도마 여자 금메달도 쟁취했다. 여서정이 한층 성장하고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어김없이 아버지 여홍철의 이름이 거론됐다. 그만큼 아버지의 존재감은 컸다. 한국 여자 체조의 간판이자 미래를 이끌 주역 앞에 항상 여홍철이라는 이름이 달렸다. 여서정이 인터뷰를 할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질문이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위대한 아버지를 둔 운명이었다.
일간스포츠는 지난 주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국가대표선수촌에서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둔 여서정을 만났다. 그색다른 인터뷰를 제안했다. 아버지를 뺀 인터뷰. 여홍철이라는 이름을 단 한 번도 거론하지 않는, 오직 한국 여자 체조의 중심 여서정에 초점을 맞춘 인터뷰였다. '제2의 여홍철'이 아닌 '제1의 여서정'의 솔직 담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서정은 지난해 말 어깨 부상을 당해 지금 정상 훈련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금 여서정을 가장 괴롭히는 것 역시 부상이다. 부상으로 조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을 표현했다.
"부상이 많이 좋아지고 있어요. 치료를 받고 재활도 열심히 해서 많이 호전됐어요. 설날이 지난 뒤에는 훈련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설날을 잘보내야죠. 설날 연휴에 집에 갈 생각에 행복해요."
이제 겨우 18세의 나이. 어릴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여서정은 이런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 모두 있는 것 같아요. 저를 관심있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가장 좋은 점은 저로 인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기계체조를 더 알릴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들이 기계체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좋지 않은 점은 부담스럽다는 거죠. 앞으로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계속 잘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모든 스포츠 선수들이 그렇듯 여서정 역시 체조를 시작할 때부터 올림픽을 꿈꿨다. 이 꿈이 이제 곧 현실이 된다. 여서정에게 첫 올림픽이다. 첫 올림픽 목표도 세웠다.
"올림픽은 모든 대회 중에 가장 큰 대회라고 생각을 해요. 체조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올림픽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출전하기 되니 긴장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도쿄에 가면 엄청 설렐 것 같기도 해요. 가장 큰 무대다보니 긴장도 많이 할 것 같아요. 한국 여자 기계체조에서 아직 올림픽 메달이 없어요. 저는 항상 목표를 크게 잡아요. 메달을 따고 싶어요. 제가 하는 거에 달려 있어요. 열심히 할거예요."
올림픽 메달을 위해선 '여서정'이 중요하다. '여서정'은 여서정이 구사하는 세상에 하나 뿐이 기술이다. 도마를 앞으로 짚고 공중에서 720도 회전 후 착지하는 기술. 난도 6.2점으로 여자 선수가 구사하는 기술 중 어려운 편이다. '여서정'은 2019년 국제체조연맹으로부터 독자 기술로 공식인정을 받았다. 기술 승인은 국내 여자 선수 중 최초이며 남·녀를 통틀어도 여홍철, 양학선 등에 이어 네 번째다. 도쿄올림픽에서 '여서정'을 구사할 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서정'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올림픽 때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여서정'이라는 내 이름으로 기술이 등재가 된 것이라 영광스럽고 기뻐요. 그런데 솔직히 내 이름을 딴 기술이 있다고 해서 뭔가 엄청 달라지는 건 없어요.(웃음). '여서정'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근력 운동을 많이하고 착지 쪽 강화훈련을 하고 있어요. 자세를 여러 가지로 바꿔 가면서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올림픽의 무게감. 성공하면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라면 순식간에 역적으로 몰리는 것도 올림픽이 가진 얼굴이다. 이를 감당하기에는 18세 소녀에게 가혹한 일일 수도 있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주변의 시선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주변의 관심을 감사하게 받았어요. 그런데 올림픽이라서 부담감이 있어요. 설레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해요. 올림픽에서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여서정은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을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계체조를 알고, 즐길 수 있을 그날을 상상한다.
"기계체조는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스포츠인 것 같아요. 앞으로 제가 할 일은 기계체조를 널리 알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기계체조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저로 인해 알 수 있게 돕고 싶어요. 이렇게 하다보면 아마도 나중에는 존경받는 선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의 롤모델은 없어요. 잘 하는 선수들 영상을 많이 찾아보기는 해요. 지금 이 순간에는 시몬 바일스(미국)가 제일 잘 하죠."
현재 한국 체조대표팀에는 양학선(28·수원시청)이 있다. 그는 2012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체조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목에 건 전설이다. 한국 모든 체조 선수들이 존경하는 선배. 여서정에게 양학선은 어떤 존재일까.
"양학선 오빠요? 제가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너무나 잘 알려주세요. 그런데 장난을 너무 많이 쳐요. 오빠의 장난 때문에 조금 힘들 때도 있어요.(웃음) 그렇게 장난을 치다가도 훈련에 들어가면 달라져요. 오빠가 도마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요. 또 멋있는 선수를 본 적 있어요. 진천선수촌 식당에서 김연경(배구) 언니가 걸어가는 것을 봤어요. 키도 엄청 크고, 엄청 카리스마가 있었어요. 키가 커서 제가 목을 완전 뒤로 젖히고 봐야 했어요. 말을 한 번 걸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한국 여자 체조의 간판이지만 체조장을 벗어나면 여느 18세 소녀와 다를 게 없다. 마음껏 먹고, 수다를 떨고, 사소한 것에 즐겁고. 딱 18세 고등학생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는 편이예요. 훈련이 힘들고 그럴 때면 일찍 자요. 쉬는 날에는 밖에 나가서 무조건 먹어요. 먹는 게 낙이죠. 퍼즐 맞추기 이런 것도 좋아하고요. 가장 좋아하는 건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거예요. 리듬체조, 싱크로나이즈에 또래들이 있어요. 친하게 지내면서 이야기도 많이 해요."
마지막으로 여서정은 설날을 앞두고 팬들에게 인사를 남겼다.
"도쿄올림픽까지 얼마 남지 않았아요. 남은 기간 정말 열심히 노력할게요. 올림픽에서 후회없는 결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여서정을 열심히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천=최용재 기자 choi.yongjae@joi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