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십팔(18)년' 전인 1999년, 영화계는 단순히 '놀랍다'는 표현 만으로는 부족한 신인 여배우의 등장에 들썩였다. '거장 이창동 감독의 선택'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단순한 거품으로 사그라들지 않게 만든 것은 영화 '박하사탕' 주인공으로 파격 낙점된 문소리의 재능과 능력이었다. 이후는 승승장구. 2002년 제59회 베니스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하면서 스포트라이트의 정점을 찍은 문소리는 한국 영화가 가장 빛났던 르네상스 시대 영화계가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해야 할 여배우로 탄탄대로 행보를 예약했다.

하지만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 말하듯 문소리가 성장하면 할 수록 영화계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왔고, 여배우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여자로서, 여배우로서 '결혼과 출산'이라는 무시못할 이슈까지 겪으면서 문소리는 정체성과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찾은 돌파구는 연기가 아닌 학업. 문소리는 "데뷔는 했는데 모르는게 너무 많더라. '영화 공부 좀 하자'는 심정으로 대학원에 갔고 공부가 내 취향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 결과물은 '여배우는 오늘도'라는 문소리 감독·각본·주연작으로 탄생했다.

아직은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너무나 어색하지만 책임감 하나 만큼은 여느 거장 못지 않았다. 촬영 할 때는 술에 매달려, 홍보할 때는 술을 끊으면서 매달렸고 완벽주의 성격에 걸맞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감독의 옷을 한참 입고 있던 시기 취중토크 자리에서 만난 문소리는 짙은 와인을 보며 입맛을 다시면서도 스스로와 다짐하듯 "술 끊었다. 금주 중이다"고 읊조리며 목을 축이는 것에 만족했다. 그 아쉬움은 수다로 달랬다.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알짜배기만 가득이다.

배우·아내·엄마·딸 몸은 하나지만 해야 할 역할은 수두룩하다. "딸일 때 가장 힘든 것 같다"며 슬며시 미소지은 문소리는 "딸에게 우리 부모님같은 부모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며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힘들 때마다 문소리를 가장 깊이있게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역시 남편 장준환 감독이다. 문소리는 몇 년 전 부터 최근까지 칭찬에 인색한 장준환 감독이 한 번씩 날려준 응원에 "큰 힘을 얻고 있다"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설 자리가 없다고 해야 할 일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목소리를 높인 과거의 문소리는 현재도 변함없다. 선배급 배우로 자리매김 하면서 영화계 여성 인권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고 있고, 영화 뿐만 아니라 공연·예능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였다. 11월과 12월 프랑스에서는 2016년 초연을 펼쳤던 '빛의 제국' 공연을 올리며, 현재 영화와 예능의 만남으로 주목받고 있는 JTBC '전체관람가' MC이자 멘토로 맹활약하고 있다. 개봉과 촬영을 앞둔 크고 작은 차기작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 내일도 다를 문소리다. 하지만 "특별한 것이 아닌 것" 문소리에게 여배우는 그런 존재다.

[취중토크②]에 이어‥
 

-남편 장준환 감독도 지지해 줬나요.
"음…. 지지는 해주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좀 그런게 부부지만 서로의 일에 대해 반대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가까이 있는 사람이니까 힘들면 도와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결정은 각자의 몫이죠. 아, 남편이 그런 말은 하더라고요. '당신은 내가 참 좋아하는 배우인데, 배우를 아주 안 할건 아니죠?'(웃음)"

-여성영화 부족, 시나리오 부족 등 영화계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나요.
"뭐 본인 영화에도 그렇게 여자 캐릭터가 안 나와요.(웃음) 그래서 제가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죠. '숫자(흥행)도 중요하기는 한데, 양도 중요하다. 여자 감독 역시 양적으로 훨씬 많아져야 질적으로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캐릭터로 구현돼야 한다.' 영화계 현실이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죠. 취향은 비슷해서 다행이에요. 대화를 하다 보면 뒷담화 등 훨씬 사적인 이야기가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사람 취향이 되게 비슷해요. 근데 웬만하면 한탄보다는 응원을 하는 편이에요. 기운나는 말 해주고 싶잖아요."

-기억에 남는 응원이 있나요.
"2014년 때 쯤인가. 문자로 '작품이 너무 없는데 이렇게 계속 내가 잘 살 수 있을까요? 적응 해야 하나요? 잠시 이러는 걸까요?'라는 고민을 보낸 적이 있어요. 작품이 없다고 해도 시나리오가 종종 들어오는 것과 똑 떨어진 느낌은 다르잖아요. 후자일 땐 불안해지죠. 그랬더니 '게임을 만들어 던져요. 이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새로운 게임, 새로운 룰을 만들어야죠'라는 답이 오더라고요. 순간 '아니 좀 끼워주면 되지, 왜 나한테 만들라고 해요. 잉잉. 나빠. 써주지'라고 투정 부렸어요.(웃음)"

-신뢰가 담긴 메시지네요.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나는, 너무나 큰 힘이 되는 말이에요. '당신은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지지도 담겨있죠. 또 있어요. 사실 남편이 제 연기에 대해 극찬을 한 적이 거의 없어요. 아쉬운 말 먼저 하고. 그럼 '내 눈에도 다 보이거든요?'라고 대꾸하죠. 다정하고 부드러워도 내용적으로 칭찬에 후한 편은 아닌데 최근에 '난 앞으로의 문소리 연기가 지금까지보다 훨씬 기대돼요. 이제 진짜 문소리가 나올 것만 같아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해줬어요. 이전에는 이것저것 다 잘하고 싶어 여기저기 나를 어떻게든 맞춰 보려고 애썼다면 지금은 충분히 노력하되 나 다운 것, 나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는 감이 어렸을 때 보다는 생겼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아, 그런 것을 이 사람이 느껴주는구나' 싶었죠."

-한 번씩 던져주는 한 방이 있네요.
"매달 월급은 안 갖다 줘요. 월급이 없으니 한 방이 있어야죠.(웃음) 매달 월급을 가져다 주시는 분들은 한 방은 없더라도 기본적인 안정감은 있을테고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배우·아내·엄마·딸 여러 역할 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역할이 있을까요.
"딸. 딸일 때가 제일 힘든 것 같네요. 아마 부모님께 효도를 안 하니까 힘들게 느껴지는 거겠죠? 지금까지도 받기만 하는 입장이니까. 애교 많고,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하고, 목욕탕 같이 가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대학교 다닐 때 남자친구가 있어도 소개시켜 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우리 엄마한테 처음 소개시켜 준 남자와 결혼했거든요.(웃음) 그렇게 착한 딸은 아니에요."

-딸이면서 엄마이기도 하잖아요.
"부모님은 평생을 저에게 헌신적이셨어요. 그래서 전 딸에게 좀 미안해요. 우리 딸에게 난 우리 부모님처럼 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연두야, 스무살 되면 엄마랑 따로 사는거야. 그리고 네가 벌어서 그걸로 살아야 돼' 했어요. 딸은 아직 그게 뭔지 잘 모르니까 '정말? 응, 알았어'라고 하죠. 근데 옆에서 엄마·아버지가 노발대발 하시면서 '너는 지금까지 이러고 있으면서 스무 살이 뭘 안다고 나가서 살라고 하냐. 돈은 왜 버냐. 왜 애 학비를 자기보고 벌라고 하냐'고 하는 거예요.(웃음) 엄청 혼났어요."

-손주에 대한 애정은 또 다르죠.
"연두가 요리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어요. '연두야, 요리에 소질 있나봐, 얼른 배워서 엄마 밥해 줘야지. 요리사 되면 참 좋겠다' 했거든요. 그 때도 혼났어요. 옆에서 우리 엄마가 '딸한테 밥 얻어먹을 생각하냐'고 하셨죠.(웃음) 부모님은 그러세요. 우리한테 뭐 안 해도 되니까 딸한테 잘하라고."

-연두는 엄마 아빠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나요.
"네. 조금씩 아빠는 영화 만드는 사람, 엄마는 연기하는 사람이라고 인지하고 있어요.  근데 그걸 어디서 티내거나 이야기 하지는 않아요. 우리 두 사람의 성격을 닮아서 내성적인 편이에요."
 

-JTBC '전체관람가'를 통해 영화와 예능을 동시에 맛보고 있는데 어떤가요.
"시간이 더 있었으면 더 많이 같이 다녔을텐데 프랑스 공연까지 잡혀서 만드는 것은 함께 할 수 없게 됐어요. 아쉬워요. 관객이자 시청자 분들에게 다양한 영화적 재미를 알려 드리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예요. '영화는 블록버스터지~' 하는데 그런 것 아니더라도 좋은 영화들이 많다는걸 전해 드릴 수 있는 기회이다 싶어요."

-캐스팅이 대단해요.
"감독님들이야 돈 주고 만들라고 하는데 안 할 사람 없죠. 투자금 회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완전 땡큐지.(웃음) 크든 작든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메이드 되기가 쉽지 않잖아요. 한 두 작품 찍고 오래 쉬는 감독님들이 더 많고. 영화를 만들 때 이 사람들이 어떻게 얼마나 살아 숨쉬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신인감독상'에 노미네이트 될 가능성도 많아요.
"아휴. 아니요! 괜찮아요. 상은 집에 많아. 남편 것, 내 것 벽 한 면에 종류별로 가득해요. 개인적인 상보다는 관객들과의 만남이 더 중요하고 좋아요. 어떤 작품을 하든 그럴거예요. 진심입니다."
 
-문소리에게 여배우란 무엇일까요.
"특별한 것이 아닌 것. 남들이 '여배우'라고 알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지는 않아요. 변화되는 것도 없죠. 연기하는 한 사람일 뿐이에요."

조연경 기자
사진=박세완 기자
영상=박찬우 기자
장소=삼청동 르꼬숑